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Chap 6)
6. 시험, 동맹자, 적.....어떤 서사가 우리 세계를 결정하는가
민주주의를 위한 안전한 세상 만들기
우리 인간이 거짓말이나 반쪽 진실을 폭로하는 데 더 능숙하다면 이제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우리에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낯선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이 거짓말인가 진실인가라는 단순한 판단이 맞을 확율은 약 54퍼센트이다. 이야기하는 낯선 사람이 비전문가이든 정보기관 요원이든 경찰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우리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하면서 그렇게 훈련을 했음에도 참으로 비참한 확률 아닌가? 우리와 친숙한 사람들의 경우 올바른 판단은 상대의 전후 배경과 상대가 무슨 이야기하는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또는 우리의 예감이나 솔직함도 영향을 준다.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상 진실을 위한 투쟁과 상호 신뢰 교환이 일찍이 우리를 자극해왔다. 상당수의 인류학 이론은 우리 인간이 언어와 이야기를 발전시킨 가장 첫 번째 이유가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며, 우리 뇌가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타인을 더 잘 속이고 속임수를 더 잘 인식하기 위해서라고 가정한다.
우리는 세상의 거의 모든 조작적인 내러티브가 일종의 변명이나 정당화라는 것을 인식한다. 말하자면 개인이나 대중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의도적인 재평가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마스터 스토리, 즉 지배적인 내러티브로 만들려면 그 내러티브에 새롭고 대안적인 스토리를 입혀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집단 역학, 즉 확산의 도미노 효과를 다시 거치게 된다. 말하자면 이른바 확산 이론(Diffusion theory)의 의미에서 자신의 주변 세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개개인이 변명이나 거짓말, 또는 반쪽 진실을 퍼뜨린다. 모든 사람에게는 사실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믿음이 흔들리는 임계점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당신 주변의 많은 사람이 UFO 를 믿기 시작한다면 장기적으로 확고부동하게 당신 혼자 이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 해도 진실을 종종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숭 ㅣ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누가 '진실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누가 이야기를 조작하려고 하는지가 항상 처음부터 분명했다면 이야기하는 것과 듣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결말의 불확실성에 도입부의 불확실성이 겹쳐야 비로소 흥미진진해진다. 누가 왜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것일까? 왜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의심이 너무 많은가? 아니면 너무 적은 것일까?
화자와 청자의 관계는 마술사와 관중 사이의 관계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마술사가 속임수를 놀이로 인정하고 김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관중은 기꺼이 속임수에 넘어갈 의향이 있다.
우리가 기존의 서사의 일관성을 위해 견지하는 가장 흔한 인식의 왜곡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그에 따라 모든 정보를 분류한다. 우리는 우리의 확신가 상충하는 지식보다 우리의 견해와 의도를 뒷받침하는 지식을 더 중요하게 평가한다. 말하자면 우리 자신은 적어도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볼 때는 서사적으로 매우 좋지 못한 판단을 내린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최고의 사기꾼이다.
우리가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 선호도조차 사회학적, 경제적 허구다. 우리는 사후에 과거를 회상하며 인과관계를 만들어 '나는 그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사후판단 편향, 혹은 잠복성 결정론(Creeping Determinism)이라고 부른다.
우리 삶은 자원과 권력으로의 접근을 체계화하는 몇몇 조작적 내러티브에 의해 결정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적대자인지 분류한다. 그리고 권력과 불의를 아주 믿을 만하게 미화시켜서 우리 사회의 토대가 사물의 질서에 대한 정교한 허구라는 사실을 우리가 더 이상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인류 역사 초기에 사냥꾼들은 매머드를 실제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그래야 이야기가 더 널리 전파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허풍이 우리 인간을 천적으로부터 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러한 진화적 이점을 다른 인간에게 맞서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어른 동화 : 호모 이코노미쿠스
전문적으로 진실을 제조하고 주문하는 자들은 인간을 효용 극대화라는 단 하나의 기능으로 축소하는 경제학의 핵심 이론을 암시적 또는 명시적으로 내세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 (경제학에서는 '합리적 행위자' 또는 '효용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라고도 부른다)는 모든 시점과 모든 조건에서 자신의 이득을 늘리려고 한다. 그것도 무제한으로 말이다. 호모 이코모니미쿠스는 비용-편익 원칙에 따라 세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끊임없이 자신의 소유를 증대시키려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내러티브와 그 토대를 이루는 인간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 분명 이성적이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우리 중 많은 사람을 전혀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이미 비판한 바 있다. 마르크스는 18세기의 로빈슨 이야기를 "'부르주아 사회'의 선례"라고 보았으며 '자연에서 독립한 주체'를 '한편으로는 봉건 사회 형태의 산물로, 다른 현펀으로는 16세기 이후 새롭게 발전한 생산력의 산물'로 보았다. 그리고 경험적 관념에서도 그의 말은 옳았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하나의 모델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쟁전이 종식된 후 미국은 이념적으로 내러티브를 과격화시켜서 승리한 내러티브로 칭송받게 했다. 이를테면 가급적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한 자유 시장경제뿐만 아니라 시장 급진적이며 자유방임주의적인 근본주의까지 극치로 끌어올렸다. 모든 시장 참여자의 완전한 자유와 그들의 최대 번영을 방해하려는 '좋은' 시장과 '나쁜' 국가라는 내러티브는 1980년대부터 2008년 금융위기까지 전 세계적인 논쟁을 주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내러티브는 모두가 자신의 성과에 따라 합당한 보사을 받는다는 능력주의 (Meritocracy)신화로 지지받았다.
20세기의 모든 성장 이데올로기와 착취 이데올로기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즉 자유 시장과 (잘못 추정된) 성과 원칙을 통해 탁월하게 정당화될 수 있다. 혹자는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에 가까운 이러한 믿음과 관련하여 마치 종교와 같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종교의 규율과 계명, 작용 기제, 설교자는 예를 들면 2008년의 글로블 금용위기 때나 장기적으로 삶의 기반을 파괴하는 경우에도 의문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은 분명 미쳤다
종교가 오랫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서사였던 이유는 문화적 역사, 문명의 범위 안에서 불공평하게 분배된 권력과 지배를 체계화 및 정당화하고 나아가 모든 초월성을 통제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에서 종교는 경쟁 상대가 되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새롭게 두 가지가 등장했다. 바로 소설과 경제다. 이 두 가지는 우연을 그저 신의 뜻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종교보다 그것을 더 잘 지배할 수 있었다. 이 둘은 생각보다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8세기 유럽의 문학 장르로서 인기를 얻은 소설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회적 맥락에 깊이 몰두할 수 있는 '선도적 매체(Leitmedium)'로 발전했다. 문예학자이자 철학자인 요제프 보글은 소설이 무엇보다 '우연성 기능', 즉 우연에 맡기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내내 우연과 자의적인 신의 섭리에 조종되어 비틀거리지 않고 자신의 내적 충동에 따라 행동했다. 동시에 소설은 경제적 주체를 확립했다.
러시아 문학사가 미하일 마흐진(Mikhail M. Bakhtin)이 보여주듯이 우리의 이야긴느 현대 소설의 등장으로 타자에 의해 결정된 스토리, 즉 인간이 운명이나 신이 야기한 기이한 일들과 만나게 되는 스토리에서 주인공이 행위 유발자가 되는 플롯으로 변천했다. 비교적 자유로운 부르주아적 주체가 확립되는 동시에 개인에 관해 이야기하는 적절한 방식이 생겨났다.
왕의 발명
왕의 이야기는 선지자 사무엘의 탄생과 사명으로 시작된다. 판관 사무엘은 나이가 들자 자기의 일을 이어받아서 할 사람으로 아들인 사울과 다윗을 지정한다. 그러나 두 아들은 신에 대한 경외심은 거의 없고 본인들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자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의뢰하며 부탁한다. "보소서, 당신은 늙었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길을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가 하듯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스라엘 민족은 침략과 압제로부터 해결책을 마련해야 했다. 사물엘은 단 한 명의 통치자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이기에 두려움에 경악하고 통치자를 왕으로 세우는 것을 거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의 소망을 다라야 한다고 설명한다. "백성이 네게 한 모든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구약의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이 정치적 격동 시대에 예루살렘 중앙 정부가 있는 군주제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잠깐 상상해보자. 인간이 최종적으로 정착하고 더 큰 사회를 구축했을 때 적어도 세 가지 발전에는 새로운 이야기들이 필요했다. 첫째,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자기 파괴적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직을 정비해야 했다. 둘째, 한 지역의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낯선 민족을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갈등과 공존이 전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든 타결이 이루어져야 했고, 경계 설정이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셋째, 사람들은 정착과 함께 처음으로 재산을 축적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경제 지렛대로서 상속이 생겨났다. 문명은 점점 더 커지고 더 부유해지고 경쟁이 더 심해졌으며 이에 따라 위계질서도 더 엄격해졌다. 즉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권력과 부를 가짐으로써 더 맣은 권리와 특권을 동시에 누렸다.
조직화할 수 있는 집단이나 문명, 도시, 국가의 규모가 커질수록 소수의 사람이 상층에 위치하고 다른 많은 사람이 하층에 위치하는 지에 대한 이유는 더 정교하고 더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설득력 있는 스토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실제로 스토리는 자원의 부당한 분할과 이용가능성에 논리적으로 좋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모든 국민은 가장 독단적인 불의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종교는 매우 효과적인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 로 자리잡았고 , 군주제 역시 성공적인 스핀 오프(Spin-off)가 되었다.
이스라엘 초대 왕의 이러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초대 교황 베드로가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황제를 숭배하라고 명령한 내용은 신에 의해 합법화된 지상의 대표자로서 왕의 전통을 확립하고 이를 통해 군주제에 복종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카톨릭교회가 거의 2천 년 동안 내세운 근거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중세 군주주의 자기 서사 중 일부는 명백히 군주제를 비판하는 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군주제의 발명은 그 전제의 부조리함(한 개인이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다른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력을 얻는다)을 감안해 볼 때 놀라울 정도로 오래 지속되었다. 군주제가 인류 역사에서 꾸준히 지속되었었던 것에 비해 자유민주주의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개념이다. 사회가 세습군주제 원칙에 실질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세기 전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불안정한 시대에 이러한 역경에 맞서 싸우는 사회의 통치자가 신의 위임을 받았다는 이념만큼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왕은 신화적 영웅의 업그레이드였으며 자신을 증명할 필요조차 없고 순전히 자신의 조냊와 이를 둘러싼 신화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불안정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은 오늘날까지 왕에게서 보이는 영웅 숭배를 설명할 수 있다. 왕관과 소위 '푸른 피'는 왕에 대한 이러한 동화의 상징일 뿐 원천이 아니다.
신의 권한에 의해 합법화된 왕이라는 논리에서 왕은 당연히 어떠한 세속적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으며 '신의 은총으로' 신의 뜻을 수행한다. 이러한 점은 왕을 비판으로 공격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모든 결정과 결의가 신성하게 합법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허구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없었다.
군주제의 성공뿐만 아니라 군주제적 서사를 가능하게 하고 자기 보호를 위해서도 필요했던 기독교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강력한 초자연적 현상, 신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 집단 규칙의 준수가 수반되었다. 어쨌든 지옥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종교에서도 흥미로운 발명품 중의 하나다ㅏ.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착하게 행동하도록 만들 듯이 사람들도 이승 세계의 규율을 잘 따르게 위해 영원한 고통과 고문으로 괴로워하는 지옥의 묵시록에 관해 이야기했다. 신의 처벌에 대한 실존적 두려움은 인간을 도덕적 태도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
계몽의 프로그램은 세계의 탈주술화였다. 계몽은 신화를 해체하고 지식에 의해 상상력을 붕괴시키려 한다. 이에 따라 계몽주의의 이성적 프로그램은 종교, 귀족, 미신에 대한 위대한 서사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격렬한 서사적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내러티브를 제시했다. 18세기 혁명가들은 모든 사람은 원칙적응로 평등하다는 기상천외한 이념에 근거하여 세습군주제를 폐지하고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지닌 권력 대표자를 선출하게 했다.
새로운 동화 : 누구나 자신의 왕관을 만든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돌리는 이야기를 포기하고 세상에서의 우리 위치가 출생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버린 후부터 우리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말하자면 성공과 실패가 부지런함과 재능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노력과 성과를 근거 삼아 어떤 사람들은 출세하고 어떤 사람들은 궁핍하게 산다는 사실을 점점 더 받아들였다. 새로운 지배 권력도 더 이상 출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직책에 '마땅한' 사람에게 주어졌다. 서구의 성과주의 사회의 모든 경제적, 사회적 자기 서사는 이러한 능력주의 내러티브에 기반을 두고 있다.
개인마다 크게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자기 운명을 통제하고 있으며 일어나는 사건이 우리가 내리는 결정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통제에 초점을 두는 것은 소위 기본적 귀인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orr) 와 결부되어 있다. 말하자면 타인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책임이 그들 개인에게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잠재적 성공에 대한 믿음, 우리 성공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있다는 믿음은 우리의 전체 사회 시스템, 특히 경제에 득이 된다. 내가 직업적인 자기 효능감을 느낄 때 비로소 이를 위해 매일 일어나고 초과 근무를 하고 감정적, 육체적으로 힘을 소모하고 좋아하지 않는 업무를 해결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우연이 기본 전제가 아닌 내러티브에서 마법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가 행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희망은 우리가 더 잘하기만 한다면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믿게 한다. 또한 희망은 고된 일과 반복되는 실패라는 힘든 순간을 통과하여 우리를 안내한다. 반면 다량의 운이 성공을 결정지을 뿐 우리가 부지런한지 아닌지는 거의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최선의 경우에는 태연해지거나 최악의 상황에는 낙담하거나 사기를 잃게 된다. 후자와 같은 이야기는 자본주의와 같은 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는 비생산적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연을 거부하면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유지할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전적으로 우리의 업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지 쿠키에 불과할지도 말이다.
말하자면 능력주의는 영웅 여정의 중요한 전제, 즉 훈련과 극복, 변화를 통해 자신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자신을 변화시킬, 다시 말해 자신을 극대화할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열심히 일할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해피엔드를 누릴 자격이 있다.
능력주의적 관점은 교육, 직업, 인간관계로의 접근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지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미 학교 교육에서 재능이나 성과, 자질에서 쉽게 파생되지 않는 사회적 불평등을 만든다. 거의 모든 서구 사회에서 교육과 직장에서의 성공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는 여전히 부모의 지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성공은 얻어지기보다는 상속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더 좋은 자질을 갖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황금빛 미래가 자신의 성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가 선호하는 자기 서사는 독자적을 자신의 길을 나아가며 모든 역경과 운명에 맞선느 사람으로 귀결된다.
이 때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그 책임이 본인에게 있으며, 나아가 자신들이 성과가 있는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산다고 확신시키는 서사적 속임수가 사용된다. 그러므로 능력주의는 뒤처지고 배제된 사람들을 영웅 여정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적대자로 만든다. 그리고 영웅 여정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상대로 자연스럽게 공감 연습을 한다.
흑인을 만들어내다
특권층의 사람들은 자신이 특권층에 위치할 자격이 있다는 이야기, 자신의 우월성이 만물의 자연적 질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땅한 권리라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것은 인종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즉 피부색이나 두상 형태, 머리카락 구조 등이 부당한 대우의 정당함과 불변서을 합법화한다는 것이다. 인종 이념은 오랫동안 피부색에 근거한 일종의 백인을 위한 능력주의였다. 사람들이 인종에 대한 거짓말에 더 확신을 가질수록 그 거짓말은 점점 더 진실로 인지되었다.
노예제도와 다양한 '인종'의 개념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노예는 있었지만 '인종'은 없었다. 피부색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기는 했지만 누가 어떤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고 정해지지는 않았다. 그리스인의 시각에서 이집트인이나 에티오피아인은 자신과 같은 민족이었고 단지 예술이나 문화, 사는 곳이 달랐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것이이 그리스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화적 척도와 비교하여 이를테면 북부의 종족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간주했다. 한 사람의 가치가 외모가 아닌 출신 성분으로 확정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후 이론'에 근거하여 인간의 위계를 발전시켰는데, 이에 따르면 지중해성 기후는 지중해 주변의 문명화된 민족으로 이어지지만 북쪽의 극한 추위나 남쪽의 건조한 더위는 오로지 야만인을 발생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리스에[서는 발현 형질(Phenotype) 과 노예제도가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며 사회적 지위가 유일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동유럽인을 비롯하여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노예가 되었으며 '노예(Slave)' 라는 단어나 '슬라브(Slav)'에[서 파생되었을 정도였다.
유럽이 아프리카를 공격적으로 식민지화하면서 주라라와 같은 초기 홍부 자문가는 유럽인에게 유리한 민물의 질서를 기술하는 업무를 받았다.
인종의 발명은 나중에 정신적, 도덕적으로 막대하게 진보한 계몽주의 시대가 되어서도 겨우 아주 서서히 폭로될 수 있었다. 18세기 말 임마뉴엘 칸트조차 여전히 백인, 인도인, 흑인, 아메리카인이라는 네 가지 '인종'에 대해 기술했다. 그는 근면, 이성, 문화적 능력에 따라 인종이 구분되며 오직 '백인'만이 완전한 문명을 이룰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칸트는 나중에 식민지 정복과 노예제도를 비난하기는 했지만 전 시대를 통틀어 자신의 모슨을 깨닫지 못한 학자 중 대표적인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새 시대 계몽인의 적대자는 전근대인 혹은 계몽되지 않은 단계의 '미개한' 인간이었다. 사이비 과학을 근거로 생물학적으로 '연구된' 또 다른 인종차별과 함께 광범위한 세계적 불의를 정당화하는 후속 내러티브가 등장했다. 19세기의 성숙한 국민은 왜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착취당했는지, 직접적으로 노예가 되지는 않았더라도 왜 그토록 잔인하게 전쟁을 치르고 억압받았는지에 대해 종교적 신화를 넘어서는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계몽된 백인들이 계속해서 고급문화와 학문에 탐닉하는 동안 나머지 세계는 그들의 부를 위해 혹독하게 일해야 했다.
인종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타국을 정복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그곳의 거주자를 적대자로 만들며 이와 함께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게 만든느 가장 강력한 동화에 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시대에 맞게 조정되고 있다. 1929년 미국에서 멕시코인은 백인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30년부터는 더 이상 백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백인이 아닌 사람의 이주가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42년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무기 생산을 위한 노동자가 필요해지면서 멕시코인은 다시 백인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피부색이 사회적 상황에 따라 상대화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예다.
우리 인간은 하나의 종이며 인간보다 펭귄 사이에 유전적 차이가 더 많다는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이미 오래전에 입증디었다. 언어학자 아니톨 슈테파노비치(Anatol Stefanowitsch)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인종'이라는 용어가 특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우리가 문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명사가 지정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항상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종' 이라는 단어처럼 문장을 해석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어떤 사람도 인종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함으로써 인종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이것이 당연히 문제라는 사실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자 바바라 필즈(Barbara Fields) 와 카렌 필즈(Karen Fileds)는 피부색과 인종자별주의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즉 '인종'과 인종차별의 관계는 마녀와 마녀사냥과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마녀는 한 집단의 사람들을 적대자로 만들기 위해ㅔ 고안된 것이다. 하지만 이 발명의 결과는 실제적이고 잔인하다.
동시에 인종차별적 근거는 자기 부담을 덜기 위해 사용된다. 말하자면 인종차별적 근거는 차별하는 사람이 행하는 인종차별을 차별받는 사람의 피부색으로 변환시킨다. '이 사람은 피부색 때문에 무시당했다.' 언뜻 보기에 이 문장은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잘못된 문장이다. 즉 '이 사람은 인종차별 때문에 무시되었다.'가 맞다. 이는 우리에게 깊숙이 내재화된 속임수로 지금껏 회자되어온 '인종'에 대한 내러티브를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잔인한 어른 동화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