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밖의 것은 예상하지 않으면 찾지 못한다. - 헤라클레이토스 -
풀 수 없는 수수께끼에 관하여
초자연적인 것은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초자연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만약 세계에 대한 축적된 지식이 하나의 섬을 이룬다면, 그 섬은 우리가 더 많이 배울수록 커진다. 모든 섬이 그렇듯이 이 섬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이 바다는 무지의 바다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다. 섬이 커지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경계인 무지의 해안선도 커진다. 달리 말해서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무지를 낳는다. 자연에 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탐구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무지의 바다 곳곳에는 알 수 없음의 영역들, 즉 과학 탐구의 영억을 넘어서는 질문들이 존재한다.
과학은 여전히 세상 삼라만상을 탐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과학이란 인간의 발명품이며 그렇기에 분명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지식 체계는 틀릴 수 있다. 발전을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실패는 변화를 촉진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존재의 모든 측면을 공략할 합리적 이유도 없다. 어떤 수수께끼들은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아닌 것들도 있다.
패턴 찾기
자연에서는 특정 패턴이 규모를 달리하면서 반복적으로 등장할 때가 종종 있다. 허리케인의 나선, 커피 속의 휘저은 크림, 나선은하 그리고 달팽이 껍질 등을 생각해 보자. 또는 우리 몸이 상반신에서 팔다리로, 그 다음에 손가락과 발가락으로 뻗어나가듯이 나무, 강, 그리고 인체의 동맥과 정맥이 어떻게 뻗어나가는지 생각해 보자. 나선과 분기는 매우 흔한 패턴으로서 많은 종류의 생물과 무생물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자연의 디자인에 깃든 두 가지 핵심 원리와 공동 작용으로부터 생긴다. 에너지 효율과 최적화가 바로 그 두 원리다. 모든 자연현상은 최소 에너지 경로를 따라 흐른다. 돌은 직선으로 떨어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경로여서 가장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비누 거품과 풍선은 표면장력을 최소화하려고 둥근 형태를 띤다. 눈송이는 물 분자의 기하구조 덕분에 육각형 모양을 띤다.
믿음
결정적인 근거가 없을 경우 둘 중 어느 선택이든 믿음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과학적인 믿음과 전통적 종교적 믿음, 즉 교리의 근본적 차이를 유념해야만 한다. 과학에서는 어떤 믿음도 반대 증거가 쌓여나가면 유지될 수 없다. 잘 확립된 사실을 거스를 수는 없다. 변화에는 저항에 생길지 모르나, 결국 그릇된 개념은 폐기된다.
과학, 특히 고에너지 물리학과 우주론에는 흥미로운 문제점이 하나 있다. 일부 이론들은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틀렸음을 입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결코 죽지 않는 좀비와 마찬가지로, 어떤 물리적 과정에 관한 이론은 자꾸만 재정의를 통해 실험 내지 관찰에 의한 검사를 피해갈 수 있다. 해당 이론이 틀렸다는 증거가 나올 때마다 기준을 수정하여 새로 발표한 이론은 검증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예측을 내놓을 수 있다. 마치 천국에 이르는 계단처럼, 올라설 때마다 계단이 자꾸만 추가되는 형국이다.
이성, 신념, 그리고 지식의 불완전성
세계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지적인 약점이나 사고력의 결함이 아니다. 대신에 일종의 해방이라고 보아야 한다. 지식의 불완전성 덕분에 우리는 궁극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부담 없이 자유롭게 미지의 바다를 탐험할 수 있다. 의미 있는 모든 발견은 뭐든지 새로운 질문을 내놓기 마련이다. 우리가 궁극적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기대는 지식에 대한 과학적 추구를 종교적 추구로 변질시킨다. 오직 종교에서만이 궁극이라는 개념을 인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실재의 절대적 본질이라는 것이 설령 존재하더라도,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든 통하지 않고서든 그 본질을 총체적으로 품어 안을 수 없다. 과학은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자연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 내는 설명 기법이다.
불가사의의 매력
과학적 결정의 독특한 점은 결코 최종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과학에는 '사안 종결'이 없다. 과학은 지식을 찾는 꾸준한 활동인지라, 추가 실험과 데이터 분석을 포함한 증거의 연속적인 축적이야말로 과학이 제 역할을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수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도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결걱에는 잘 되어 나간다. 과학적 발견은 충분한 시간이 경과한 후 내려지는 집단적 동의에 바탕을 둔 결정이다.
만약 지식이 빛이라면, 이 빛은 영원한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 빛이다. 또 어쩌면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퐁트넬이 17세기 후반에 적었듯이 "우리의 철학은 단 두 가지, 즉 호기심과 근시안의 결과다." 우리는 볼 수 있는 것보다 많이 보길 원한다. 인간의 많은 지식은 원하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에서 생겨난다. 미래에 관해 모든 내용을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온갖 것들을 익혀야 한다. - 헤라클레이토스 -
열대의 송어
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다. 자연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워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활동이다. 그렇기에 과학은 교실에서만, 칠판을 통해서만, 또는 컴퓨터 기반의 가상 실험으로만 배워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자연과 사랑에 빠지고 이해하고 싶어지려면, 살아 움직이는 자연을 보아야만 한다. 밖으로 나가서 미시적인 크기에서부터 우주적인 크기까지 온갖 규모에서 벌어지는 아찔할 정도로 다양한 움직임, 형태 및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생명의 놀라운 창조성도 경험해야 하는데, 에너지가 태양으로부터 나와 대기와 대양을 거쳐 식물과 우리 인간에게까지 이어지는 에너지 흐름을 관찰해야 한다. 생물계와 화학계 및 물리계의 상호의존성, 그런 학문들이 어떻게 협력하는지를 목격해야 한다. 지식을 인위적으로 구분해 놓은 교육방식에서는 그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교실 내에서 과학을 배우기 전에 학생들은 먼저 바로 가까이서 자연을 경험해야 한다. 관찰하고 경험한 다음에 개념을 배워야 한다.
과학의 시대에 사랑의 의미
우리는 물질적인 감옥이든 정신적인 감옥이든 작은 세계에 갇혀 지내는 삶을 못 견딘다. 어항 속의 금붕어를 생각해 보자. 이 가엾은 생명체는 평생을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야 할 운명일 뿐만 아니라, 어슴푸레한 윤곽으로 파악할 수 있다. 유리 너머에 있는 자유는 감질날 정도로 가깝지만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바깥 세계는 더 위험하며 미지의 것이고 어쩌면 치명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우리의 행성과 현재의 지식 수준에 갇혀 있다. 우주 공간으로의 도약은 우리의 공간적 경계를 확장시켜 줄 수는 있지만 치명적일 수도 있다.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는 일은 지식의 섬을 확장시킬 수 있지만 또한 더 많은 미지의 것, 어쩌면 아예 알 수 없는 것들을 내놓을지도 모른다. 누가 평생 동안 작은 어항 속을 뱅긍뱅글 헤엄치길 원할까?
과학은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실제로 과학은 자신의 씨앗으로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성장을 위한 핵심 에너지인 사랑을 필요로 한다. 이는 과학을 과도하게 감성적으로 대하는 태도와 무관하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에게 느끼는 끌림보다, 그 사람이 없으면 작은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 신세처럼 인생이 불완전해질 것이라는 확신보다 더 신비로울 게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사람"은 다른 인간일 수도 있고 자연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니라 망각이다.
애착 속의 자유
낚시는 물고기와의 줄다리가 아니다. 물고기의 턱을 너무 세게 잡아당기면 물고기는 그 압력에 반응하여 자유를 되찾고자 몸부림친다. 계속 당기면 몸부림이 더 심해진다.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다가 마침내 바늘에서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줄을 끊고 달아나서 여러분을 빈털털이로 만든다. 낚시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유혹은 밀고 당기기여야 하지,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여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하나의 생명체, 즉 애착과 자유에 대한 자신만의 인식이 있는 존재다.
송어를 놓쳤을 때 나는 그걸 존중해야 함을 배웠다. 송어는 나를 조롱하려고 도망친 게 아니었다. 송어가 자유로움을 느끼도록 만들 방법을 내가 몰랐기 때문이다. 가장 참된 관계에서만 애착 속의 자유가 있다.
한계는 방아쇠다
사람은 다른 생명을 사냥하는 동물들 중에서 가장 삐뚤어진 존재이다. 늘 전리품으로 쓸 동물, 우두머리 수컷, 무리에서 가장 큰 동물을 찾는다. 다른 대다수 포식자들은 그러지 않는다. 그들은 약한 동물, 무리에서 뒤처진 동물, 부상당한 동물을 찾는다. 우리가 사냥하는 방식은 매우 파괴적이다. 가장 강한 녀석을 죽이는 바람에 유전자 풀을 약화시키고 무리에서 선택이득을 앗아간다. 대다수 동물들이 어떻게 번식하는지를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동물 관련 다큐멘터리에 자주 나오듯이, 수컷들은 지배권을 두고 싸워 이기고 나서야 암컷과 짝짓기를 할 수 있다. 왜일까? 전부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서다. 싸움의 승자는 가장 강하다. 승자가 번식하면 그의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만약 우리가 가장 강한 동물을 죽이면 그 무리의 생존을 해롭게 하고 약화시키며, 자연선택의 작동을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방해하는 셈이다.
도전하지 않으면 정체된다. 하지만 도전만 하다 보면, 즉 맹목적으로 자기 수준보다 더 멀리 가려고 하다 보면 이미 성취한 것을 즐길 수가 없다. 관건은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일 지점을 찾아내서, 운동선수들이 즐겨 말하듯이 거기에 온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성취한 결과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또 한편으로 다음번에 조금 더 세게 자신을 밀어붙이면 된다. 바로 그렇게 우리는 자긍심과 겸손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다. 지금 수준에 도달하도록 애쓴 노력을 가치 있게 여기는 자긍심 그리고 아직도 늘 향상시킬 여지가 있음을 이해하는 겸손, 이 둘 다가 필요하다. 자긍심이 너무 크고 겸손이 너무 작으면 교만해진다. 자긍싱이 너무 작고 겸손이 너무 크면 자존감과 성취감이 낮아진다.
이민자와 개구리 두 마리
"옛날 옛적에 작은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가 든 통에 빠졌단다. 첫 번째 개구리는 헤엄쳐서 통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어. 하지만 통은 너무 높았고 개구리 다리는 짧았어. 금세 지쳐서 포기하자 곧바로 가라앉았지. 두 번째 개구리는 달랐어. 헤엄친 건 첫 번째 개구리와 똑같았어.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지쳤는데도 포기하지 않았어. 계속 헤엄치고 또 헤엄쳤지, 계속 헤엄을 쳐서 우유를 휘젓다보니 어느덧 우유가 버터로 변했지 뭐니. 그러자 온힘을 다해 도약해서 통을 빠져나올 수 있었단다."
중대한 사안을 놓고서 아무렇게나 추측해선 안 된다. - 헤라클레이토스 -
아기 지구, 아기 생명
태양계는 대체로 수소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름 덩어리로부터 형성되었다. 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단순하고 풍부한 화학원소로서, 핵 속에 양성자 하나가 들어 있다. 이 수소 구름에 한 무더기의 무거운 원소들, 가령 탄소, 산소, 칼슘, 금, 철 등이 섞여 있었다. 이 모든 물질은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지금 우리가 이해하기로 가장 가벼운 두 원소인 수소와 헬륨만이 별이 탄생하기 한참 전인 우주의 유아기 동안에 출현했다. 리튬과 중수소(deuterium;원자핵 속에 양성자 하나와 중성자 하나가 든 수소의 동위원소) 등의 다른 원시적인 가벼운 원소들도 이후 곧 합성되었지만 양은 훨씬 적었다. 우주론자가 보기엔 우주에서 중요한 화학 원소는 수소(전체의 75퍼센트)와 헬륨(전체의 24퍼센트) 이다. 그 밖의 모든 주기율표의 다른 원소들은 죽어가는 별들에 의해 훨씬 나중에 합성되었다. 과학자들이 우리 인간을 두고 별의 물질이라고 하는 건 바로 그런 뜻이다.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별 먼지의 덩어리다. 죽은 별들의 살아 움직이는 잔해인 우리는 자신의 기원을 궁리하는 존재, 즉 사고하는 물질의 우주적 덩어리다. 하늘을 올려다볼 때 우리는 자신의 과거를 보는 셈이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우리는 고대의 우주적 근원과 이어지길 갈망하는지 모른다.
우리처럼 별에도 생애 주기가 있다.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결국에는 연료를 소진한 다음에 죽는다. 하지만 별은 외부에서 연료를 들어오지 않는다. 연료는 자기 안에 있다. 별로서 존재하기 위해 별은 자기 자신을 소비시켜야 한다. 스스로를 먹어치우는 셈이다. 본디 수소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이라고 할 수 있는 별은 자신의 죽음에 저항하기에 충분한 복사압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별은 자신의 수소를 태워야 하는데, 이때 핵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수소를 헬륨으로 변환시킨다. 별을 죽음으로 이끄는 무자비한 내부 인력에 맞서기 위해서다. 보통 수십 억 년이 지나서 별은 중심부에서 수소가 고갈되면서 헬륨으로 태우기 시작한다. 그러면 헬륨이 탄소와 산소로 변환된다. 별이 얼마나 무거운지에 따라 그 과정은 더 무거운 원소들의 생성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고 거기서 멈출 수도 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서 거대한 폭발이 한 번 일어나고, 별은 내부 물질 대다수를 우주 공간에 쏟아낸다. 이런 물질 속에는 생명에 필요한 무거운 화학원소들이 섞여 있다.
50억 년쯤 전 한 수소 구름이 우리 은하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어느 시점에 주변의 죽어가는 별들로부터 격렬한 충격파가 닥치면서 수소 구름의 평온한 상태가 깨지고 무거운 원소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편으론 중력이 작용하여 수소 구름을 수축시킨다. 구름은 수축하면서 점점 더 빠르게 회전하다가 차츰 평평한 원반 형태를 이루고, 대다수의 물질은 그 중심부로 떨어진다. 남은 잔해들은 중심부 주위를 미친듯이 돈다. 시간이 흐르면서 중심부는 응축되어 뜨거워지다가 마침대 점화되어 태양이 되는 반면에, 나머지 부분은 응결되어 크기와 구성 성분이 저나마 다른 세계들이 된다. 이렇게 10억 년 남짓 경과한 시기에 태양계가 태어났고, 지구는 태양에서 세 번째로 가까운 행성이 되어싿. 여기서 벌어진 일은 광대한 우주에 걸쳐 거듭 거듭 벌어진다. 죽어가는 별이 새로운 별을 낳고, 창조와 파괴의 사이클이 온 우주에 걸쳐 반복된다. 에너지가 흘러 다니면서 물질은 한 패턴에서 다른 패턴으로 춤추듯 옮겨간다.
이렇게 생겨난 초창기 지구는 녹은 물질들로 이루어진 뜨거운 공의 형태로, 부글부글 끓으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혜성과 운성 형태의 잔해물들이 어린 지구와 무자비하게 충돌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구는 귀중한 물질들을 얻었다. 바로 물과 단순한 유기물, 즉 탄소가 포함된 화합물 같은 다양한 화학물질들이다. 그때를 가리켜 맹렬한 선물 공세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다. 생명은 여러 번 출발에 실패하고서 시간의 먼지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 생명의 역사는 그 행성의 일대기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느 두 행성도 일대기가 똑같지 않기에, 생명은 반복할 수 있는 실험실이 아니다. 전 우주에 걸쳐 동일한 생화학적 원리들을 공유할지도 모른다. 가령, 모든 생명이 탄소 기반이며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될지 모른다. 하지만 각각의 세계는 고유의 생명체를 낳을 테며, 이 생명체는 우연에 따라 그리고 해당 세계의 고유하게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 돌연변이를 겪을 것이다.
지구의 생명체는 고유하며, 만약 다른 곳에 생명이 있더라도 지구의 생명과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행성의 가장 정교한 생명체이므로 우리는 그만큼 고유한 지적 존재다. 만약 다른 항성계에도 지적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근사적인 좌우대칭처럼 우리 인간의 일부 특징을 공유할지는 몰라도 우리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어떤 외계 생명체라도 아주 멀리 있을 테니까, 사실상 우리는 혼자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우주에서 매우 중심적인 존재다.
여기서 생명의 기원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생명이 적어도 35억 년 전에, 원핵생물이라는 매우 단순한 단세포 생명체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원핵 생물에는 핵을 감싸는 뚜렷한 유전 물질이 없으며 아울러 더 발달된 세포들에서 보이는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특수한 세포기관들도 없다. 이 원시적인 생명체는 여러 층의 케이크처럼 생긴, 호주 서부에서 발견된 퇴적 구조인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에서 확인되었다.어쩌면 생명은 이보다 훨씬 이전에 생겨났을 수도 있지만, 그렇기는 해도 후기 대폭격이 39억 년쯤 전에 끝났기에, 만약 생명이 '고작' 4억 년 후에 출현했더라도 매우 복잡한 형태임을 감안할 때 그걸 가장 빠른 발전 상태라고 여겨도 무방하다. 적절한 조건을 지닌 어떤 다른 세계에서 생명을 발견하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들뜬 낙관론에 빠져 과도한 확신을 갖지 말자는 뜻에서 다음을 유념하자. 단순한 탄소화합물로부터, 심지어 단순한 아미노산으로부터 살아 있는 단세포 유기체가 나오는 데에도 엄청난 도약이 필요함을 말이다. 생명에는 함께 작용하는 복잡한 탄소 기반 분자들 수백 만 개가 필요하다. 신진대사를 통해 거친 외부 환경과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살아가려면 말이다. 게다가 생명은 번식을 해야만 지속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은 개체로서 사는 동안만 존재한다. 사실 번식이 없으면 종의 개념도 무의미하다. 가장 낮은 차원에서 볼 때, 생명체는 다윈이 밝혀낸 진화와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라 번식할 수 있는 분자 기계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고 무엇을 성취할 수 없으리라는 말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과학의 작동 방식, 다시 말해 과학의 무한한 잠재력과 아울러 내재적 한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주용하다. 과학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관해 한껏 부풀린 말들이 많다. 과학이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다는 일종의 낡아빠진 긍정 일변도의 우월주의를 드러내는 표현 말이다. 더욱 현실적인 견해는 과학을 인간이 하는 하나의 활동으로 여기는 것,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처럼 한계가 있고 오류가 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계에 관해 더 많이 배우게 되면서 개념과 세계관은 줄곧 변화해 왔다. 과학의 본모습을 이해한다고 해서 과학의 아름다움이나 엄청난 능력이 사라지진 않는다. 최종적인 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그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일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최종적인 답이 아니라 더 효율적인 데이터와 모형화를 바탕으로 자연을 더 잘 기술하는 것이 과학의 관건이다. 이런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려면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지식의 한계가 필요하다.
지식, 끝없는 추구
인간에겐 직접적으로 닿을 수 있는 곳 너머에 있는 영역, 즉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것은 우리 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지 모른다. 동물은 안전하길 원하기 때문에 노출되지 않은 익숙한 경계 내에서 살아간다. 이전에 시도했던 잘 적응된 행동 패턴을 지키고 그런 전략 덕분에 번성한다. 심지어 서식지를 옮기는 동물들도 탐험가는 아니다. 자신들의 뿌리에서 벗어났다가는 치명적일 수 있다. 한편 인간에는 미지의 세계로 풍덩 뛰어들려는 욕구가 있는지라 불편하고 심지어 위험적인 일에 자신을 노출시킨다. 우리는 위험을 개인 단위에서도 종 단위에서도 감수하며, 정해진 한계 너머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붙인다. 경계가 안전하면서도 신축성 있고 확장 가능하기를 원한다.
정신적인 측면도 물질적인 측면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지식을 얻으며, 사고와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찾는다. 과학은 단지 자연계를 기술하는 일 말고도 훨씬 많은 일을 한다. 과학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우리의 헌신이며, 존재의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재정의하려는 인간 욕구의 한 표현이다. 우리의 세계관이 변하면, 세계 속 우리의 위치에 대한 인식과 인간성의 의미도 따라서 변한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의미 탐구의 표현 방식인 예술과 맞닿는다.
한계는 우리 주위의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만약 미세한 미생물이나 멀리 떨어진 별을 맨눈으로 볼 수 없다면, 인간은 시야를 확대하기 위해 현미경과 망원경을 발명한다. 만약 인체 내부나 수중을 볼 수 없다면 시야를 확대하기 위해 X선 기계와 소나(sonar)를 발명해 낸다. 우리가 보는 현실은 미지의 세계로 우리의 도달 범위를 확장시킬수록 계속 변한다. 과학자들이 계속 탐구할 자금을 얻는 한 이런 추구에는 끝이 없다.
거기 누구 있나요?
생명은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이 펼쳐지는 실험의 장이다. 최종 목표도 최종 계획도 없다. 달리 말해 생명은 궁극적인 목적이 없다. 만약 생명체가 잘 적응해 있는 상태라면, 돌연변이는 대체로 치명적이거나 쓸모없을 것이다. 적절한 예로소 우리가 가진 유일한 사례, 즉 지구의 생명을 살펴보자. 생명이 우리 행성에 존재해 온 35억 년 가운데 30억 년 동안 생명은 대체로 매우 단순해서, 단세포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긴 해도 이미 단세포 동물 내에서 복잡성의 엄청난 전환이 벌어져, 원핵생물에서 진핵생물이 출현했다. 원핵생물은 유전 물질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생명체인 반면에 진핵생물은 DNA를 담은 보호막과 더불어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는 세포 구조들인 여러 세포기관들을 가지고 있다. 다세포 생명체의 복잡성에서 보이는 이 핵심적이지만 전부 다 파악되지는 않은 도약이 벌어진 후에도, 지구의 생명은 여전히 역사의 대부분 비교적 단순했다.
격변이 시작된 계기는 대기에 산소가 점점 많아지면서부터였다. 단세포 원핵생물 조상들이 광합성 작용을 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우리를 비롯해 다른 다기관 동물들이 존재해 올 수 있었던 까닭은 우연한 돌연변이 덕분이다. 돌연변이의 출현으로 인해 단세포 박테리아가 지구의 초기 대기 속에 든 풍부한 이산화탄소를 소비하고 산소를 배출했다. 그런 작용이 우리 행성을 변화시켜, 복잡한 생명을 지속시키는 데 꼭 필요한 재료를 제공했다. 현재의 측정값에 의하면 대기 중 산소 농도의 급격한 증가는 약 10억 년 전에 시작되어 5억 년쯤 전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바로 이때부터 다양한 다세포 생물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때를 가리켜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고 한다. 산소가 풍부하지 않아 신진대사 기능의 이득이 적었다면, 복잡한 생명의 출현 가능성은 아마도 낮았을 것이다.
영혼의 한계를 밝혀낼 수는 없으리니, 그렇게 하려고 모든 길을 다 보더라도 말이다. 그만큼 영혼의 의미는 깊다. - 헤라클레이토스 -
현대적인 창조 이야기 : 통합된 관점
현대과학이 제시한 창조 이야기에서 얻는 근본적인 교훈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소위 빅뱅이라는 동일한 태초의 불공(firebgall)에서 나왔다니 말이다. 모든 별, 행성, 달, 생명체가 똑같은 화학원소들, 즉 빈 공간을 채우는 똑같은 우주 먼지를 공유한다. 모든 생명체가 움직이는 별 먼지인 셈이다. 지금 이 행성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수입억 년 전에 존재했던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나왔다. 과학이 알아내기로, 과거에는 물질적 통일성이 존재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공통기원을 가졌다는 의미다. 시간이 이 통일성을 갈라놓는 바람에 지금 우리 주변에 보이는 것과 같은 다양성이 펼쳐졌다. 만물이 단일한 기원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우리는 생명의 다양성을 존중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 도덕적 의무 이상으로 축하할 일이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우리 존재의 씨앗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지구의 소중함에 눈 뜨기
현대 천문학 그리고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기후 변화 모형화 작업을 통해 드러난 발견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른다. 지구는 유한한 자원을 가진 희귀하고 유한한 행성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진화했으며, 우리의 생존은 지구의 장기적인 안정성에 달려 있다. 80억 남짓의 사람들한테 음식과 주택이 필요하기에 우리는 고향 행성과 더 지속 가능한 관계를 일구어나가야 한다. 자구는 예측 가능한 미래까지 우리를 부양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행성이다.
기후 변화와 행성 차원의 지속 가능성을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 중대한 도전과제에 직면한다. 첫째, 변화는 점진적으로, 즉 대다수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기에는 너무 서서히 일어난다. 둘째, 현상을 유지하려는 엄청난 정치적/경제적 아력이 존재한다. 중대한 사회적 불안과 전 지구적 격변이라는 암울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경고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다지 크게 바꾸지 못한다. 현실적인 변화, 즉 마음가짐의 변화는 신재생 에너지원에 기반을 둔 신기술이 경제적으로 경쟁력 있거나 심지어 더 나아가 매력적인 것이 될 때라야 일어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태양열, 풍력 및 바이오연료의 조합이 석탄, 가스 및 석유보다 값싼 전기를 생산할 때라야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