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Chap 11)

강대원 2025. 5. 5. 09:57

11. 부활...지칠 대로 지친 원숭이

 

위기에 처한 자아

 

   작가 윌 스토가 자신의 저서 ≪셀피 : 서구는 어떻게 자신에게 집착하게 되었는가(Selfie : How The West Becamed Self-Obsessed)≫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우리 시대가 처한 자기 서사 위기는 많은 사람을 자살로 이끌고 있다. 자신에 대한 높은 기대, 다른 사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망감, 수치심, 이러한 악순환을 끊고 싶은 충동, 이러한 슬픈 패턴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0.1퍼센트의 사람들이 자살로 목숨을 잃고 100명 중 2명은 살면서 자살을 시도한다. 생존은 우리 존재의 주요 목적이다. 

   윌 스토는 자사로 이어질 수 있는 자아의 치명적 위기가 조직적이라고 믿는다. 우리 사회는 타인의 거울에 비친 사회적 완벽주의를 조장하여 자기 서사에 균열을 일으키고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감을 느낀다. 자신을 그저 '맨인홀'로 인지하여 자기의 영웅 여정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은 적대자가 된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자기 최적화(Self-Optimization)를 요구하고 정치적 해석 주권을 둘러싼 논쟁은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 태세를 취하게 하며, 내러니브 주도권을 얻기 위한 싸움은 우리를 지치게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명시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내러티브를 체;험하고 판단하고 우리의 자기 서사 안으로 분류해야 한다. 우리의 서사적 자아는 쉴 새 없이 도전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는 달리 자기 자신을 잊을 때 사실상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행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헝가리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entmihays)가 19070년대에 창시한 몰입 이론(Flow Theory)은 많은 경험적 연구를 바탕으로 행복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괴테가 파우스트라는 인물에게서 발견한 대답과 똑같은 대답을 제시한다. 즉 인간은 수동적이고 쾌락주의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즉 창조와 생산성을 통해서만 지속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내러티브가 곤경에 빠진다. 말하자면 우리의 이야기는 주로 촉발 사건(Inciting Incident) 에 의해서반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결정적인 사건이나 때로는 위협적인 일이 발생할 때만 주인공들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의 이야기는 선량한 상인이나 파우스트 박사와 같은 주인공이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더 많이 가지려고 할 때 자본축적이라는 경제 논리를 따른다. 그리고 이야기는 훨씬 더 치명적인 요소가 있다. 즉 이야기기 끝이 난다는 것이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희극적이든 비극적이든, 희망적이든 달고 씁쓸하든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기에 분명한 종결이나 결승선, 적어도 이야기 하나가 끝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러나 인생 자체는 오로지 하나의 길이 있으며, 이 끝은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다. 인생은 엔딩 크레딧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자 첫 장면 이전에 일어난 것이며 플롯과 장르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행복을 제공하는 몰입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왜냐하면 몰입에는 표현할 수 있는 갈등, 해결되어야 할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갈등-해결-갈등-해결이란느 이분법적 되풀이는 긴장이 항상 즉시 해결되기 때문에 흥미진진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갈등-투쟁-해결이라는 삼박자들 더 즐겨 듣는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으로 전달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만족스럽\다. 결국 인생에는 진실로 명백하고 불변하는 좋은 것이 거의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실수를 하거나 노력하며 투쟁하지 않는다. 또한 잘못된 갈등을 선택하거나 그 갈등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시작부터 파우스트처럼 악마의 계약을 맺고 많은 것을 정복하고 축적하지만, 결코 포만감을 느끼지 못한다. 

 

섹스, 거짓말, 영화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경제와 그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경제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 숫자는 안정성을 암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 세계에 대해 신뢰성, 합리성, 객관성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숫자는 단어만큼 상대적이다. 그런데도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내러티브 중 일부는 경제적 내러티브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학적 내러티브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들이 잘못되거나 파괴적이지 않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성장 내러티브가 지구의 파괴로 이어질 치명적인 하강의 소용돌이로 얼마나 우리를 몰아가는지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어른 동화는 구조적으로 볼 때 반영웅 여정(Anti-Hero's Journey)이다. 반영웅 여정은 사람들에게 모험도, 여행도, 변화도 없다고 약속한다. 아니 그 이상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하고 돈을 모으고 불평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그대로 있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달라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시스템이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사람들은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만 그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불공정하고 파괴적인 시스템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불쾌감은 정치적 무력감과 자기효능감 결핍과 결합한다. 그렇다면 점점 더 세분화하는 사회에서 새롭고 조화로운 자기 서사는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 현재 가장 선호되는 대답은 놀랍게도 개인주의적 성향이다. '마음챙김'과 '자각'이 붐을 이루는 이유는 이것이 개인을 자립적인 존재로 서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치유'해야 한다. 이 말은 이미 외부로부터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치유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적대자는 기껏해야 '유독한' 관계에 불과하다. 시련은 언제나 자신의 심리적 행동 영역에 존재한다. 즉 우리는 소통하고 감사하는 법,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근심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점성술과 또 다른 탈정치화

 

   인간을 지배하지는 않더라도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우주의 광선(Cosmic ray)에 대한 기본 내러티브는 아주 오래되었다. 이미 유목 문화의 초기 신화에서도 태양과 달은 포괄적인 자연 철학의 결정적인 행위자로서 나타난다. 약 2500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천문학과 점성술의 첫 번째 증거, 즉 이러한 내러티브를 구체적으로 구현한 첫 번째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중세 말까지 이야기는 왕실 엘리트인 궁정 천문학자들의 의무였다. 그들의 임무는 별의 궤도를 관찰하고 계산하며 이를 전기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천문학과 점성학은 서로에게 흘러 들어갔다. 대략 200년 전부터 비로소 별점(Horoscope)은 대중적인 것이 되었고 사람과 그의 별자리에 관한 이야기는 일반화되었다. 

   점성술은 우리의 자기 서사에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맞추어질 수 있으며 심지어 자기 서사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 점성술은 어떤 재해석에도 충분히 열려 있는 동시에 지나친 분석에도 충분히 구체적이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점성술은 일련의 지침과 구실, 이야기로 구성된 세트를 제공한다. 그 외에도 점성술은 사람들을 범주에 따라 분류하고 범주마다 일괄적으로 특성과 기회, 위험을 할당한다. 이 세상에서 집다은 범주화하고 분류하는 일이 점점 더 소멸하는 추세지만, 우리는 점성술과 관련하여 인간화된 동물 이미지가 주는 모호한 내집단 일부로 남아 있다. 점성ㅅ울은 우리 시대의 복잡성과 암호화에다 대략 계절에 기초한, 말하자면 우리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주기로 분류하는 단순한 해석 방식을 지속적으로 대응시킨다. 점성술은 인과관계를 제시함으로써 소회된 개인의 무력감을 희망과 만나게 한다. 자신의 기본 성향을 알아야 점성술이 작동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의 많은 점성가가 청중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는 점이다.

   이처럼 서구 사회에서 20~50퍼센트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점성술은 모든 합리성에 반대하는 다채로운 현대의 자아 서사의 일례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범주로 분류하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조합을 발견하거나 피하며 모든 삶을 분명한 인과관계에 연결해 이야기하려는 욕구가 그 어떤 이성보다 더 강력해 보인다. 이와 동시에 많은 사람이 별점과 같은 것을 상황에 따라 능숙하게 아이러니하게 사용한다. 별점이 전부 맞지 않으면 어깨를 으쓱하면서 장난으로 받아들인다. 또 별점 내용 중 사실과 맞는 부분이 있으면 눈썹을 치켜세우며 뭔가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별점을 읽을 때 우리는 거대한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을 보인다. 즉 별점이 맞으면 옳다고 생각하고 맞지 않으면 무시한다. 

   점성술은 인간을 완전히 자의적이고 검증할 수 없는 기준에 따라 범주화시키기 때문에 사이비과학이고 편협하다. 이를 통해 점성술은 신기하게도 자기애적인 탈정치화로 이어진다. 즉 책임이 시스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태어난 시점의 별자리, 그것도 꾸며낸 별자리 앞에 있는 태양의 위치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것인지, 아니면 별자리에 전가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점성술을 믿기는 하지만 좀 더 성찰적인 사람들은 점성술이 유전자, 사회화, 환경과 함께 거대한 영향권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설명으로 여전히 거짓으로 꾸며낼 수 있고 정치적으로 가공할 수 있는 의미 체계에 지위를 부여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회라고 말하는 다양한 이야기는 모순되는 울림을 제공한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충실하되 자기 최적화의 명령에 굴복하지 말라!', '자신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되 더 나은 버전의 자신이 되라!', '자신에게 아량을 베풀되 신중하라!', '혼자서 기후를 구할 수는 없겠지만 기후의 영웅이 되라!'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모순을 피해 개인적으로 세상을 다르게 서사적으로 해석하고 모든 인지 부조화를 피할 수 있는 탈정치화된 이야기로 도피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현대 문화는 이러한 상황에서 거의 아무런 위안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조차 언제나 통제와 최적화 방식으로 대처하려는 시도를 넘어 현대 문화에는 해당 주체의 시각에ㅐ서 무의미하게 보이는 이러한 불가용성을 다룰 만한 문화적 모델, 내러티브,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예전에는 이 자리에 종교가 있어서 우발적인 사태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했다. 거의 세속적인 현대 문화에서는 어느 정도 좌절하며 자신의 인생 계획이 실패했음을 확인하거나 개인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자신의 무력함을 투영시키는 것 외에는 주체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자기 결정적이고 성공적인 삶이라는 특히 까다로운 모델에 기반을 둔 후기 근대에 부정적인 불가용성과 화합할 수 있는 문화적 모델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울 만큼 현저하게 눈에 띈다.

 

이야기 광장

 

   일간지와 같은 전통적인 대중매체는 전날의 사건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언제나 사건이 발생한 간에 이야기가 시작되어 사건의 성질을 깊이 생각하기 어려운 속도로 빠르게 전개된다. 오늘날에는 사건을 전하는 뉴스와 그에 대한 반응이 훨씬 빠르고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즉 우리는 책의 한 줄을 읽을 때처럼 실시간으로 서사한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행위자와 발신자, 수신자가 누구냐에 따라,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속도로 그리고 서로 다른 영향력을 나타내며 전파된다. 우리는 일종의 구조파 이야기 시장에서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개인적으로 사들인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이야기 시장에서 보이는 사회적 마찰은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 세대마다 다르다는 데에 어느 정도 기인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소위 베이비 붐 세대는 사건의 경과와 올바름에 대한 엄격하고 명확한 이야기, 다시 말해 전 세대에 해당되는 일종의 딥 스토리이와 함께 성장했다. 적대자는 처음부터 분명했고 그 후에는 굴볼했다. 내러티브의 범위가 근본적으로 더 작았고, 게이트키퍼(Gatekeeper) 인 전통적인 매체를 통해 내러티브가 사회 전반에 걸친 중요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나아가 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규제되었다. 그 결과로 생겨난 자신감은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보편성에 대한 그의 주장으로 크게 오해된) '역사의 종말'이라는 개념에서 정점에 달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덕에 수요에 따른(On demand) 내러티브가 가속화하고 있다. 또한 디지털 공공이라는 틀 안에서 차별화되어가는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정체;성과 감정을 순전히 기술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는 전 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고 디지털 공공이라는 맥락에서 사회가 전달되고 확산하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제시한다. 이때 글과 이미지로 제시된 모든 이야기 사이의 갈등 또한 이러한 이야기 또는 자기 이야기의 일부이다. 

    취소문화(Cancel Culture)라는 개념은 담론이 지배적인 마스터 스토리로 결정된다는 권위주의적 생각에서만 내러티브로 작동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편에서 다른 편에 대해 어떤 제약을 주장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는 취소문화 개념이 작동한다는 것이 그러한 불균형을 전제조건으로 인정한다는 것, 다시 말해 실제로 누군가가 서사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결정하는 사회적 위계를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중 사이에서 의견 교환의 자유에 대한 불신과 통제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난다. 취소문화의 서사적 틀은 자유로운 의견 표현과 예술의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서 비판이나 항의, 보이콧(Boycott)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자신이 피해자의 위치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취소 개념으로 반감을 산 비판가들, 즉 '취소(Cancel)'하는 사람들이 기회주의적으로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비난한다. 취소문화 내러티브에 담겨 있는 속박에 대한 잠재적 경고는 이 내러티브가 왜 그토록 효과적인지를 설명해준다. 말하자면 이 내러티브는 다른 사람에게 투영된 권위주의다.

    이야기기의 과잉 공급은 사람들이 선택 가능성과 자유의 폭이 더 넓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앞에서 언급한 피로감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서사를 단순화하려는 욕구를 촉발하기도 한다. 이는 머지않아 우리가 '서사 부조화'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지 부조화와 유사하게 서사 부조화는 이치에 맞는 두 가지 내러티브가 서로 모순될 때 발생하는 긴장감이다. 이는 모호함을 제거하고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내러티브를 내세우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제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현재의 만물 질서와 나아가 다수의 이야기를 쉽게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가 현실을 어떻게 지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사회가 적대적인 파벌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고 있다는 두려움이나 내러티브가 생겨난다. 

    많은 서사물이 우리에게 감정적, 지성적으로 도전 정신을 일깨우고 있으며 우리는 훨씬 더 자주 그리고 더 빠르게 내러티브를 재정비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러티브와 모순되는 내러티브를 허용하고 보호할 임무, 그리고 민주주의적 담론과 표현의 자유를 공격하고 나아가 관용 자체를 공격하는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비판해야 할 임무를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띠고 있다. 1945년 칼 포퍼(Karl Popper)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무제한 관용은 필연적으로 관용의 소멸로 이어진다. 우리가 심지어 관용적이지 않은 사라들에게까지 무제한 관용을 베푼다면, 그리고 비관용의 공격에 맞서 관용적인 사회 질서를 지켜낼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관용적인 사람들은 파멸할 것이고 관용도 그들과 함게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 혐오 내러티브, 원시 파시즘 내러티브, 음모론 내러티브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담론을 의도적으로 손상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면서도 그러한 담론에 몸담으로써 강력한 내러티브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이것은 우리 자유 민주주의의 딜레마이다.

 

정체성 정치 : 서사 부조화와 서사적 자아의 관리

 

   정체성 정치는 '인종적, 성적, 이성애적, 계급적 억압'에 맞서 싸우는 전략으로 사용된다. 

   민주주의 담론에서 자기의 뜻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체성 정치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독사회당(CSU)이 기독교 휴일에 춤추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에 찬성한다면 기독사회당은 기독교인을 위한 정체성 정치를 하는 것이다. 다수 집단의 대표자들은 항상 담론에 반영된 자기 뜻을 보아왔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가 어느 부분에서 자신들에게 작용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정체성 정치는 민주주의적 참여 노력과 정치적 자기 권한 부여를 의미하며, 이는 앞서 언급한 스미스의 선언문보다 훨씬 오래된 관념이다. 

    이른바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정체성 정치가 민주주의적 평등주의 사상, 말하자면 모든 목소리가 평등하고 모든 사람이 피부색이나 성별, 성적 취향, 계층에 상관없이 발언자로서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계몽주의적 관념에 반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비평가들의 관점에서 볼 때 정체성과 관련된 특정 이해관계는 보편주의 사상과 모순된다. 

    이러한 점에서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은 옳다. 그렇게 비판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전제하고 있는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야기는 윤리적으로는 보편적으로 옳지만 많은 사람의 현실에서는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 지구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쁜 대우를 받는다. 처음부터 비대칭이 존재한다. 즉 다수 집단과 생존을 위해 다수 집단에 적응해야 하는 소수 집단. 소외된 계층의 목소린느 언제나 업압되거나 무시되어 왔다. 비평가가 지키고자 하는 평등주의는 사회적으로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는 이상이다. 왜냐하면 다수 집단에 이러한 비대칭성은 눈에 보이거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권층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정체성 정치라는 내러티브는 이러한 숭고한 이상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진다.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해당하지 않는 불의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저널리즘적, 문화적, 정치적 도전이다. 이러한 필수적인 공감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전하는 이야기의 의미다. 다른 사람의 영웅 여정이 나와 상관없다고 느끼는 순간,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장애물과 도전이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영웅의 변화 과정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진정으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순간 상대방이 상처받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게 되며 나 또한 상처받게 된다. 

   여기서 딜레마를 인식할 수 있다. 즉 보편적 평등을 추구하려는 계몽사상과 일상적 현실 사이의 딜레마다. 역설적으로 일상적 현실에서는 기존의 불평등을 지적할 수 있도록 이질성과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를 구분하는 것을 지정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차이가 생겨난다는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피부색의 과소대표(Underrepresentation)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피부색과 같은 것을 유념하여 생각하기 때문에 진정한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러티브는 메신저와 메시지를 혼동한다 정체성 정치 가 사회를 분열시킨다는 주장은 평등 또는 이질성, 평등주의 또는 정체성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동등한 권리라는 맥락에서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평등에 도달한다. 이 두개의 가치는 전혀 상충하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의 전제가 된다.

    정체성 정치라는 개념을 논쟁으로 도입시킨 콤바히 리버 컬렉티브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우리는 받침대, 여왕의 지위, 열 걸음 뒤에서 걷는 것을 거부한다. 인간으로서, 동등한 인간으로서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선언문에서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오늘날 정체성 정치 비판가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야기에 지친 원숭이

 

   가장 강력하게 양극화시키는 내러티브는 여전히 계급의식과 정의감, 자원의 분배와 접근, 성 역할, 다수 집단과 소수 집단과의 관계, 계속 재생산되는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내러티브다. 이러한 오래된 내러티브 패턴은 특히 더 민감한 언어비평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언어비평은 주기적 반복과 진부함으로 인해 때때로 우리를 지키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단어만으로도 전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그들의 이야기에 의존한다. 

    이러한 내러티브들은 점점 복잡하고 특수하며 나아가 점점 세분화하고 있다. 그리고 수정되고 조정되며, 더 미묘하게 다루어지고 때로는 더 모순적이다. 하지ㅏㅁㄴ 우리 뇌는 계속해서 이야기 스캐너처럼 기능한다. 우리는 적대감을 형성하고 복잡성을 줄이려는 경향이 있다. 서사를 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명료함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불협화음을 통해 생겨나는 긴장감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이러한 불분명함을 견디려면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원숭이는 현실만큼 복잡하고 모호한 이야기를 허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함에 대한 관용, 즉 풀리지 않는 모호함, 다의적인 정보, 모순, 열린 결말을 견디는 능력이 필요하다. 

   모호함에 대한 관용(Ambiguity Tolerance) 이라는 개념은 아랍 연구가 토마스 바우어(Thomas Bauer)가 현시대를 분석하며 저술한 ≪세계의 명확화(Vereindeutignung der Welt)≫(2018)를 통해 대중화했다. 그는 이 책에서 사회적 부족주의와 예술과 문화의 동질화라는 특징으로 단일화되어가는 현실에서 모호함과 무순에 가능한 한 침착하게 대응하는 우리의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체성 정치 내러티브는 이에 대해 한 가지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즉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동시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욕구와 지위,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우리의 영웅 여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가지 사실이 눈에 띈다. 하나는 우리의 서사적 본능이 우리를 한데 모이게 하고 따뜻한 불가에 둘러앉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야기 속에 담긴 우리의 생각이 매우 보편적이어서 수년 년 동안 여러 문화에 거쳐 같은 패턴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생존과 의 발견이다. 생존과 의미 발견은 우리의 상황과 처지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결국 우리를 서사적으로 연결하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다시 모여야 할 인류의 큰불로 우리를 인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