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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어떻게 살 것인가 - 유시민-

by 강대원 2024. 3. 9.

1장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인생은 나의 것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나이에 아직도 이런 질문을 껴안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여태껏 살아온 내 삶의 결과임을 인정한다. 만약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미 훌륭한 것이다. 그대로 가면 된다. 그라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죄악과 비천함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다. 악당이나 괴물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훌륭한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J. S. Mill) 의 표현을 가져다 쓰자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다르게 산다. 평생 공부하는 사람,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 돈을 버는데 골몰하는 사람, 일만하는 사람, 권력을 좇는 사람, 신을 섬기는 사람 등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의 삶이 있다. 어느 것이 더 훌륭한지 가늠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스스로 설계하고 선택한 것이라면 어떤 삶이든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자유의지로 만들어낸 삶이 아니라면 훌륭할 수 없다. 

 

왜 자살하지 않는가

 

   열등감은 삶의 기쁨을 갉아먹는 부정적인 감정 중에서도 단연 고약한 것이다. 열등감에 깊이 빠지면 자기 자신을 비천한 존재로 느끼게 된다. 그래서는 기쁜 삶을 살지 못한다. 기쁘지 않은 삶은 훌륭하기 어렵다.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정신승리법'이 필요하다. 완벽한 정신승리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안흔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즐겼는 방법은 '이솝(Aesop) 우화' 에 등장하는 여우의 '신 포도 논리'이다. '저 포도는 맛이 없고 시기만 할 게 분명해.' 너무 높이 있어서 아무리 해도 손이 닿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세상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손에 넣지 못할 포도송이가 사방 널려 있다. 그때마다 열등감을 느끼고 자기를 비하한다면 제대로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여우가 교모하게 자신의 무능을 합리화했다고 비웃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다소 진부해 보이지만 삶을 긍정적인 태도로 살아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오르지 못할 나무가 너무나 많다. 곳곳에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서 있다. 도전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도 어리석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와 넘을 수 없는 벽에 매달려 인생을 소모하는 것 역시 어리석다. 모든 나무와 모든 벽을 오르고 넘어서야 행복한 삶,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게 적합한 나무, 노력하면 넘을 수 있는 넘는 게 즐거운 벽을 잘 골라야 하낟. 그렇게 해야 인생이라는 '너무 짧은 여행'을 후회 없이 즐길 수 있다.

   하루의 삶은 하루만큼의 죽음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새날이 밝으면 한 걸음 더 죽음에 다가선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로 그 무엇엔가 가슴 설레어 잠들지 못한 채 새벽이 쉬이 밝지 않음을 한탄한다.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누군가에게 영원한 사랑과 충성에 서약한다. 죽음을 원해서가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원해서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우리는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나와 물질세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탐색한다. 삶의 가치를 잃었다고 느낄 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카뮈는 이 능력의 사용에 관한 의사 결정이 유일하게 중대한 철학적 문제라고 주장했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 세계는 삼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정신은 아홉 개 또는 열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그것들은 장난이다.

 

   왜 자살하지 않느냐고 카뮈는 물었다. 그냥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는 이유를 찾으라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삶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 하루 그 의미를 충족하는 삶을 살았는지 판단해야 한다. 정답은 없다. 우리는 각자 정체성이 다른 자아들이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삶은 훌륭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돈과 큰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의미를 모르는 삶은 비천하고 허무할 뿐이다. 숱한 고난을 받고 살다가 모진 핍박을 받고 죽을지라도, 스스로 뚜렷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다면 훌륭한 인생이다. 

 

위로가 힘이 될까?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생의 품격과 성패를 결정짓는 중대사이다. 그저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발견하려는 관념의 유희가 아니다. 부조리 가득한 세상에서 존엄한 인간으로서 품격 있게 살아가려면 나름의 답을 찾아야만 한다. 세상은 냉혹하다. 발 딛는 곳마다 예층ㄱ하기 어려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늙고 병드는 것을 막지 못한다. 삶은 언제나 불안하다. 우리는 늘 어디엔가 부딪치고 누구에겐가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남들은 다 잘 해나가는데 나만 헤매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것 같아 외로움을 느낀다. 마음이 온통 폐허가 되어,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충동에 휩쓸리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라은 아무리 큰 상처를 받아도 다시 일어나 스스로를 치유한다. 반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은 작은 불운에도 쓰러지고 만다.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야 행복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다치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혀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2장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소설도, 영화도, 연극도 모두 마지막이 있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스토리가 크게 달라진다.

어떤 죽음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과 의미, 품격이 달라진다. 

 

나도 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주는 제도와 관습, 문화는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은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고치지 않으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도와 관습, 문화를 바꾸려면 '투쟁'해야 한다. '투쟁'하는데는 비용이 든다. '투쟁'하면서 즐거울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그 '투쟁'이 성공하면 혜택은 모두가 함께 누리지만, 드는 비용과 스트레스는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무네도 있다.

   그러나 어쨋든 모두의 과제를 해결하려면 모두가 힘을 보태야 한다. 마ㅑㄶ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면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그것과 더불어 살면서 나쁜 제도와 문화가 주는 스트레스에 잘 대처해야 한다. 게다가 사회가 맡아줄 수 없는 개인적 생활 스트레스가 또 있다. 우리들 각자는 사회적ㄱ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생활 사건이 주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사회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 삶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동안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좋다. 그러니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살자.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찬 이성 더운 가슴

 

   다세포 생물의 죽음은 몸을 이루는 세포 전체가 유기적으로 협력해 벌이는 생명활동이 끝나는 것을 가리키낟. 그런데 인간은 단순한 다세포 생물이 아니다. 정신 또는 지성을 가진 특별한 종이다. 모든 개인은 나름의 자아 (ego) 정체성을 지닌 삶의 주체이다. 생물학과 의학, 법학만으로는 죽음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철학적 해명이 필요하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죽음은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지성적 자아의 소멸'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철학적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과 동시에 일어난다. 사고나 중증 질병으로 사망하는 경우, 둘을 분리하기 어렵다. 그런데 자아 정체성을 상실한 중증 치매 환자의 경우처럼 철학적으로 사망하였지만, 생물학적 의학적 법률적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 철확적 죽음이 생물학적 죽음보다 선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뇌가 죽으면 지성적 자아가 기거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도 사라져버린다. 과학은 유물론 위에 서 있다. 뇌와 의식의 관계를 보아도 물질이 의식에 선행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적었던 시절, 사람들은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믿었다. 알프레드 마셜 이래 경제학자들이 애용한 '냉철한 두뇌, 뜨거운 가슴' 또는 '찬 이성 더운 가슴'이라는 표현은 그런 믿음을 멋지게 표현한다. 세상사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추론하고 계산하는 일은 두뇌가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목적에 사용할지 결정하는 것은 심장의 몫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 사랑과 연민, 나눔의 정신, 정의를 향한 열정. 이런 것들은 심장에 있다. 

    사람의 뇌는 거대한 신경망 덩어리이다. 세포의 생태계, 도는 작은 우주라고 해도 무방하다. 뇌에는 뉴런이 수천억 개나 있다. 뉴런은 수많은 돌기를 만들어 다른 뉴런과 전기적 화학적 신호를 주고 받는다. 뉴런의 돌기들이 연결되는 구조를 시냅스라고 한다. 하나의 뉴런이 많게는 1만 개의 시냅스 연결을 가진다. 시냅스를 통한 교신을 촉진하고 통제하는 데 작용하는 화학 물질은 지금까지 확인된 것ㅇ만 해도 50가지가 넘는다. 뇌세포의 교체 주기는 인체의 모든 세포 중에서 가장 길다. 부위에 따라서는 한 번 죽으면 다시 생기지 않는 것도 있따. 보고 듣고 느끼고 마로하고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든 신체활동과 정신활동을 이 세포 덩어리가 관장한다. 인간 정신은 물질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인 뇌세포 활동의 산물이다. 물질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 정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유물론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죽음과 나의 죽음

 

   '나'는 무엇인가. '나'는 욕망과 감정, 기억과 소망의 덩어리이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이것을 '에고(ego)' 라 불렀다. 에고는 이드(Id)와 슈퍼에고(Super-ego)의 통일이다. 이드는 오로지 욕망을 따르고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반면 슈퍼에고는 양심과 이상을 좇는다. 에고는 과거의 사건과 행위를 비판적으로 기억하고 평가하면서 미래를 기대하고 상상하는 가운데 현재의 행위를 설계하고 실행한다. 에고는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는 데 필요한 개인적 기준과 원칙을 만들어내며, 그 기준과 원칙에 의거하여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한다. 이 기준과 원칙이 자아 정체성의 핵심이다. 자아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외부의 위협이나 질병, 생활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생애 전반에 걸쳐 변화한다. 살아가면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이 누구든 죽음은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자아의 소멸이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특별하다.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건에 지나지 않는 반면, '나'의 죽음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주체 그 자체의 소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나'의 존재만 무로 바뀐다는 것, 이것보다 더 처절한 상실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아무리 두려워도 의미 있는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려면 이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면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낫다. 자기 자신의 죽음까지도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다. 몸은 세포로 분해할 수 있지만 자아는 분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욕망과 충동에 끌리고 휘둘리면서도 아직 실현되지 않은 선善과 미美를 추구한다. 자아는 과거를 비판적으로 기억하면서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자아는 반드시 죽어 소멸한다.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유전자는 딸 아들에서 손자로, 다시 그 딸의 아들과 손자로, 인류가 존재한 한 끝까지 죽지 않는 '불멸의 코일'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영생은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철학적 가치는 없다. 유전자는 기억하지 않으며 사유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영생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나'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주체, 지성을 가진 자아는 언제나 단 한 번만 존재한다. 유전자는 유전자일 뿐 '나'가 아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인간의 뇌는 짧게는 수백만 년, 길게 보면 40억 년 가까운 진화적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도시로 치면 매우 오래 된, 크고 복잡한 대도시와 같다. 파리나 베를린, 서울이나 베이징을 생각하면 된다. 이 도시들은 전체를 합리적으로 설계해서 만든 신도시가 아니다. 음침한 뒷골목에는 술집과 홍등가, 조폭의 소굴이 즐비하다. 구시가에는 중세기 권력자들의 부귀 영화를 보여주는 거대한 왕궁과 사원, 오래된 석조 건물이 서 있다. 

   신시가지에는 권력과 지식, 현대 문명의 상징인 마천루 숲과 정부 청사 단자. 호화 주택과 문화예술센터, 도서관과 공원이 있다. 이 도시에는 야만과 문명이, 욕망과 이성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혼재한다. 도매밤과 매, 토끼와 사슴, 침팬지와 고래, 진시황과 미켈란젤로, 히틀러와 테레사 수녀, 이완용과 안중근이 뒤엉켜 산다. 겉으로는 질서 정연해 보이지만 곳곳에서 격렬한 쟁투가 벌어지고 있다. 탐욕, 연민, 복수심, 질투심, 동경심, 정의감, 절망, 희망, 고통, 환희...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그 쟁투가 빚어낸 것이다. 

    뇌의 구조는 오래된 도시와 닮았지만 그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면 지하실이 딸린 2층집을 생각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지하실은 뇌관이다. 척수 바로 위 대뇌 아래에 있는 뇌관은 파충류의 뇌와 비슷하다고 한다. 뇌관은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생명활동을 담당한다. '위가 비면 배가 고파진다. 땀을 흘리면 목이 마르다. 배우지 않아도 음식을 씹고 물을 마실 수 있다. 소화는 위장이 알아서 한다. 마음먹지 않아도 숨을 쉰다. 가시에 찔리면 아프다. 돌이 날아오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린다.' 이런 일들은 도마뱀도 다 한다. 그러나 도마뱀이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도마뱀은 새끼를 다정하게 껴안아 핥아주지 않는다. 먹이를 다른 도마뱀과 나누어 먹지 않는다. 뇌의 지하실에는 살아가는 데는 꼭 필요하지만 남에게 내놓고 자랑하기는 좀 곤란한 것들이 들어있다고 보면 되겠다.

    뇌의 1층은 변연계 (limbic system) 이다. 변연계는 대뇌피질 아래에서 뇌간을 둘러싸고 있다. 여기에는 방이 여럿 있다. '편도'는 감정을 조절한다. '해마'는 기억을 저장한다. '시상하부'는 호르몬 분비를 조절한다. '기저핵'은 운동을 제어한다. 변연계는 오리너구리 같은 원시 포유류 단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파충류 시절에 지은 지하실 위에 한 층을 더 올린 것이다. 변연계는 특히 짝짓기를 할 때 맹활약을 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뇌에서 강한 활성도를 나타낸다. 

    뇌의 2층에는 대뇌피질 (cerebral cortex) 이다. 대뇌피질은 교양 있는 지식인의 거실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할 것이다. 서가에는 세계문학 전집이나 최신 베스트셀러 교양서가 꽂혀 있다. 개인용 컴퓨터와 홈시어터, 전화기, 안락한 소파, 해가 잘 드는 커다란 창이 있고 벽에는 램브란트의 그림이 걸렸다. 실내에는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커피향이 은은하게 감돈다. 대뇌피질은 가장 높이 진화한 고등 포유류의 것이다. 포유류 중에도 침팬지를 비롯한 영장류가 가장 발달한 대뇌피질을 보유하고 있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단연 비대한 대뇌피질을 자랑한다. 인간 뇌의 무게는 약 1.4킬로그램 정도 되는데, 80퍼센트가 대뇌피질이다. 회백색인 피질은 대뇌를 밖에서 둘러싸고 있다. 가장 중요한 부위이기 때문에 단단한 두개골이 보호를 받는다. 단어를 물건과 연관 짓고,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며,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현재의 삶을 설계하는 고도의 지적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대뇌피질이다. 

   개인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때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unselfiness) 이라는 나비홀드 니버의 말이 옳다고도 본다. 그러나 이타성이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도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른 행위일 때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욕망을 억압하면서 규범을 따르는 일이 참기 어려울 만큼 어색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욕망을 표출할 수 있는 문이 더 넓게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규범은 자기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따르면 된다.

 

자유의지

 

   삶과 죽음은 다르지만 둘 존엄할 수 있다. 사람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존엄이란 무엇인가?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디그니타스(dignitas)' 이다. 존엄은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존경과 고귀함을 의미한다 철할적 정치적 학술적인 토론에서는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한다. 존엄성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철할자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 의 견해를 길잡이로 삼을 만하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 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적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런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차제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섬(dignity)이 그런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 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자유의지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그 사람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밀고나가는 정신의 태도와 능려기다. 인간의 존엄섬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철학자 밀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의지가 제멋대로 살고 제 마음대로 죽는 것을 무조건 정당화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를 발현할 때 지켜야 할 규칙 또는 도덕법이 있다. 칸트는 이 규칙을 이성이 내리는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 Imperativ)'이라 했다. 그는 경험의 도움이 없어도 사람은 이 규칙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의 도덕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어야 한다." "둘째, 나 자신이든 다른 어떤 사람이든 인간을 절대로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목적으로 다루도록 행동하라." 존엄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옳게 발현하려면 이 두 가지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3장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연대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지금 이곳의 행복이 그들의 것이리라!"

 

즐거운 일을 하는 잘하는 것

 

   생명활동의 기본은 '먹이활동'이다. 인간이라고 예외는 될 수는 없다. 그런데 분업 사회에서는 자기 손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누구도 자가기 먹는 모든 것으 직접 다 생산하지 못한다. 농민들조차 남이 만든 씨앗과 비료, 농약 농기구를 써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자기가 생산하지 않은 곡식과 채소, 고기, 생선, 과일을 사 먹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자기가 생산한 것을 남에게 팔아야 한다. 제조업과 서비스업 종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먹이활동' 또는 '보급 투쟁' 에 성공하려면 남에게 무엇인가 유용한 것을 주어야 한다. 기업에 취직해 노동력을 제공하든지, 아니면 자기가 사업을 해서 고객이 원하는 재와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해서 안정적으로 화폐를 획득할 때, 우리는 그 일을 직업이라고 한다. 

   인생의 성공은 멀리 있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것을 남들만큼 잘하고, 그 일을 해서 밥을 먹고살면 최소한 절반은 성공한 인생이다. 돈 때문에, 남의 눈을 의식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또는 사회의 평판 때문에 즐겁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다면 그 인생은 처음부터 절반 실패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꼭 즐겁지 않더라도 최소한 괴롭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 한다. 

 

재능 없는 열정의 비극

 

   인생은 소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냉혹한 과정인지 모른다. 원대한 꿈과 낭만적 열정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대통령, 과학자, 장군, 의사, 영화배우, 축구 선수, 교사, 판검사, 변호사, 외교관, 소설가, 기업가..... 아이들은 마음대로 꿈을 정한다. 스스로 정하든 부모가 권하든 백지에 그림 그리듯 할 수 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그려도 좋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다른 것을 그려도 된다. 아이들의 그림은 흔히 명예, 부, 권력, 지위를 성취하는 것과 연관되지만 청솝, 간호사, 서녀를 그리는 아이도 있다 이런 그림은 가치와 관련된다. 지구를 깨끗이 한다든가, 아픈 사람을 도와준다든가,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자라고 사회를 배우면서 아이들은 알게 된다. 어떤 것은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을, 다른 것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또 다른 것은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스무 살쯤 되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괜찮겠다 시은 직업 가운데 자기의 환경과 환경과 능력에 비추어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쪽으로 마음을 싣는다. 마흔 살쯤 되면 인생을 크게 바꾸는 선택은 하기 어려워 한다. 마흔 이후에도 인생을 바꾸는 결단을 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결단이 너무 늦은 법은 없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자신이 일상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쪽으로 직업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본다.

    직업을 잘 선택하려면 열등감을 극복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어디를 가든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원하는 사람이 적은 직업도 있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직업도 있다. 남들이 어떤 직업을 선호하는지 의식하지 말아야 하낟.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고르면 된다.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만약 내가 좋아서 선택한 그 직업이 다른 사람들도 많이 좋아하나는 것이라면 부득이 경쟁을 해야 한다. 그렇게 경쟁해서 그 직업을 가지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거기서 더 잘하기 위해서 또 경쟁해야 한다.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삶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이기는 게 정답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즐기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 일하게 되면, 이겨도 남는게 없고 지면 최악이 된다.

   열정과 재능의 불일치는 회피하기 어려운 삶의 부조리이다. 재능이 있는 일에 열정을 느끼면 제일 좋다. 그러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기만 한다면,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되는 만큼 하면서 살면 된다. 경쟁은 전쟁이 아니다. 져도 죽지는 않는다. 이겨서 꼭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적게 가져도 행복할 수 있다. 끝없는 경쟁 속에 살아야 하지만, 즐기면서 경쟁에 임하면 이겨도 이기지 못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필요할 때 친절하게

 

   앞에서 직업 선택이 인생 성패의 절반을 좌우한다는 것,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남들만큼 잘하라면 필요한 기능을 갖추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뛰어난 기능을 갖추었다고 해서 반드시 일을 잘하는 건 아니다. 남들과 소통하면서 호흡을 잘 맞추는 것이 기능 못지않게 중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남들과 잘 소통하면서 우호적인 곤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가 좋은 일일 뿐만 아니라 직무를 잘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일 자체는 재미있다고 해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나쁘면 재미가 반감된다. 일이 잘 되지도 않는다. 직장 동료, 상사, 고객, 거래서 사람들과 잘 지내려면 서로 좋은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인간관계를 잘 가꾸어야 한다.

 

떳떳하게 놀기

 

   놀이는 즐거워서 스스로 하는 활동이다. 생존에 꼭 필요한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의 반대말처럼 쓰기도 한다. 그러나 놀이와 일을 명확하게 나누기는 어렵다. 일도 즐거울 수 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좋아서 일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일과 놀이가 같은 것은 아니다. 놀이는 반드시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 즐겁기 때문에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한다. 일은 그렇지 않다. 즐거워도, 즐겁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게 일이다.

   놀 때는 떳떳하게 노는 게 좋다. 하지만 약간의 도덕적 부담감을 느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부담감은 노는 시간과 방법을 스스로 제한하는 데 도움이 된다. 떳떳하게 놀고 싶어서 가족과 사회에 대한 도적적 책임을 더 적극적으로 감당하도록 자극한다. 삶에는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재단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놀이가 그렇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될 범위 안에만 있다면, 밝은 마음으로 당당하게 즐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싹이 난 감자맛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며 산다. 부모, 형제, 자식, 연인, 아내, 남편, 친구, 동지, 직장 동료를 사랑한다. 예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다.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그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는가? 당신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알고 있는가? 이렇게 묻는다면 저마다 나름대로 다답할 수 잇을 것이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 이름을 하나도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풀 한 포기 키우지 못하는 황무지나 마찬가지다.

   사랑은 움직인다. 새로 생기고 변덕을 부리며 사라지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때로 사람을 속인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저 사랑한다고 착각할 뿐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도 있다. 

 

아이들을 옳게 사랑하는 방법

 

   사람들은 자식에게 무엇이든 주려고 한다. 많은 돈, 특별한 재능, 뛰어난 지능, 멋진 외모, 건강, 높은 지위, 일류 대학 졸업장, 큰 야망 등 이런 것들을 줄 수만 있다면 주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주려고 할까? 자기 자신이 원했던 것, 실제로 누려보니 좋았던 것, 또는 자신은 누리지 못했기에 자식이라도 꼭 누리기를 바라는 것을 주고 싶어서다ㅏ. 그것은 행목한 삶이다. 모든 부모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한 가지, 그것은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자식에게 다른 것을 바란다면 잘못이다. 만약 딸 아들에게 당사자가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하도록 강요한다면 그것은 자식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자녀드의 인간적 존엄을 짓밟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을 제약당하거나 빼앗긴 사람의 인생은 행복할 수 없다.

   부모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잘못은 자녀의 삶을 대신 설계하고 자녀의 행복을 대신 판단하는 데서 시작된다. 부모는 누구나 딸 아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도 자녀에게 행복을 상속해 줄 수는 없다. 행복은 사람이 저마다 느끼는 주관적 만족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다시 철학의 근본 문제로 돌아간다.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그 자체를 물려줄 수는 없는 행복, 그것은 무엇인가? 행복은 삶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기 삶에 만족하여 마음이 흐뭇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이런 흐뭇한 느끼게 되는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긴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고 격려하면서 필요할 때 적절한 도움을 주는 선에 머물러야 한다. 

   만약 자식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 두 가지를 가지도록 도와줄 수 있다 첫째는 행복을 느끼는 능력, 둘째는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가지려면 삶을 스스로 설계ㅏㅎ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자녀가 스스로 이것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시행착오를 경험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의 꿈이나 희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소망을 자녀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강제해서도 안 된다.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아이의 지능과 재능은 일차적으로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만,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잇는 아이의 능력과 관련해서는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제법 많다. 그런 것을 가진 아이를 원한다고 해서 낳을 수 있는게 이나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지능과 재능은 뇌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부터 청소년기에 이를 때까지 부모는 아이의 뇌가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는 구조와 기능을 갖추도록 도울 수 있다. 태아의 뇌는 실제 사용할 수 잇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신경세포를 만든다. 외부애ㅔ서 언제 어떤 자극이 얼마나 적절하게 주어지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는 최적의 신경망이 만들어지면서 사용되지 않는 신경세포들은 잡초처럼 뽑혀 사라진다.

   뇌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똑똑한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예컨데 아기의 뇌가 초기에 100GB 용량의 하드웨어를 형성했고, 이것이 사람이 실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하드웨어 용량보다 현저히 크다고 하자. 그런데 이 하드웨어으 극히 일부만을 사용해도 충분한 정도의 작업 명령만 주어질 경우, 뇌는 그 신통치 않은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역시 신통치 않은 운영 체계와 응용 프로그램을 만든다. 그리고 이런 신통치 않은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 여분의 하드웨어를 없애버린다. 하드웨어 용량이 줄어들고 나면 더 좋은 운영 체계와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기가 예전보다 어려워진다.

   초기의 하드웨어 용량과 뇌가 만들어 나가는 소프트웨어의 성능에 유전적 요소가 영향을 준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아기의 뇌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자극과 정보, 어떤 과제를 받느냐에 따라 그 특성과 용량이 크게 달라지는 컴퓨터이다. 뇌는 선천적이며 동시에 후천적이다. 수많은 동물 실험과 사례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막 태어난 건강한 고양이의 눈을 봉합해두면, 일정 시간이 지난 뒤에 눈을 열어주어도 보지 못한다. 눈에서 오는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뉴런과 시냅스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그것을 할 수 있었을 뉴런들을 청각이나 후각 정보를 처리하는 쪽으로 빼앗긴 것이다.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도 만져주지도 않으면 신생아는 우유를 먹어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쉽게 죽는다. 영화 주인공 타잔은 말을 하지만 실제로 늑대 젖을 먹고 늑대와 함께 자란 사람은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유전자의 명령과 환경의 자극이 힘을 합쳐 뇌를 만들기 때문이다. 뇌의 성장과 발전 과정은 태아기에 시작되어 유년기에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지만 청소년기 이후 성인기까지 멈추지 않고 평생 계속된다 뇌는 생물학적이면서 사회적이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도를 닦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두 가지만 이야기지하자. 따지고 드는 아이를 존중해야 한다. 공정성(fairness) 에 대한 인식이 일찍 발당하는 아이일수록 지적 재능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회성은 가장 높이 발달한 생물학적 재능이다. 끝없이 "왜?"를 쏟아내는 아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더 창의 적인 아이들은 덜 창의적인 아이들보다 부모를 더 힘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기존의 규범으로 길들이면 아이는 호기심을 버리고 창의적이기를 그만둔다. 어떤 부모도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식에게 줄 수는 없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훌륭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부모만이 그것을 자녀에게 줄 수 있다. 최악의 훈육 방법은 아이를 때리는 것이다. 폭력은 어떤 것이든 정서 발달을 왜곡한다. 승복할 수 없는 폭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경험은 소통과 공감 발달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로만 소통하는 존재가 아니지만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언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말을 하기 전에 아이들은 먼저 말을 알아듣는다. 뱃속에 들어 있을 때부터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문장으로 아이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아이의 뇌 속에 음성 정보를 처리하는 뉴런과 신경세포가 제대로 자리 잡게 하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갓난아이 때부터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집중해서 듣는 아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노력해야 하낟. 아이를 씻길 때도 지금 목욕을 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더 놀다가 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게 좋다. 어느 쪽이든 큰 문제가 없는 경우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말과 더불어 진행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부모가 반쪽짜리 '아기 말'을 쓰면 아기의 생각도 반쪽짜리가 된다. 

   자녀를 사랑ㅎ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그러나 잘못 사랑하는 것은 말려야 한다. 사녀를 사랑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아이들 스스로 자기가 살고 싶은 삶을 설계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인생을 선택하든 믿고 격려하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조금 도와주는 것이다. 많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최대한 표현함으로써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나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을 느낀다. 

 

품격있게 나이를 먹는 비결

 

   젋은 시절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떨쳤던 홍사중 선생은 아름답게 나이를 먹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일흔여덟에 쓴 수필집에서 그는 밉게 늙는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1. 평소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를 하면서 거드름 부기리를 잘한다.

    2. 없는 체 한다.

    3. 우는 소리, 넋두리를 잘 한다.

    4. 마음이 옹졸하여 너그롭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낸다. 

    5.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한다. 

    6.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홍사중 선 선생이 예시한 '밉상짓 목록'은 젊은이들에게도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만약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만 한다면 노인이든 청년이든 똑같이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1.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 하지 않고 겸소나게 처신한다.

    2. 없어도 없는 티를 내지 않는다. 

    3. 힘든 일이 있어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4. 매사에 넓은 마음으로 너그럽게 임하며 왠만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다. 

    5.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신중하게 행동한다.

    6.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한다. 

 

기적을 일으키는 거울뉴런

 

   맹자는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깜짝 놀라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는 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도 아니요, 마을 사람들과 친구들한테서 널리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또한 이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사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 연민, 동정심, 또는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공감하고 반응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굳이 논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측은지심은 어디에 있는가? 기쁨이나 즐거움, 아픔과 괴로움은 사람이 각자 느낀다. 모든 감각기관은 각자의 몸에 있다. 빛, 음파, 온도, 맛 등 밖에서 오는 모든 자극은 물리적 실체가 있다. 사람의 감각기관은 물리적 실체가 있는 자극에 반응한다. 나의 고통은 나의 감각기관이 감지하며 타인의 고통은 그 사람의 감각기관이 느낀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타인의 감각기관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

    측은지심은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 앞에서 나는 품격 있고 행복한 인생의 비결이 하고 싶은 일을 열정적으로 하면서 즐겁게 놀고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측은지심이 할 일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도, 놀이도, 사랑도 모두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은 인생의 성공 비결 목록에 없다. 그러나 맹자가 말한 대로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그가 중국 대륙을 돌면서 여러 왕들과 만나 한 모든 이야기의 초점은 한 가지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 측은지심을 발휘하면 만인의 삶을 고통에서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울뉴런은 생물학적 기적을 일으키는 신경세포다. 인간은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자기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타 행동을 한다. 이것은 다른 동물들의 이타 행동과는 차원이 다르다. 동물들은 보통 유전자를 공유하는 다른 개체에 대해서만 이타 행동을 한다. 새끼를 돌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굶고 있ㄴ은 다른 박쥐에게 피를 토해서 나누어주는 흡혈박쥐처럼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다른 개체에게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종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대상은 같은 무리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같은 이타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박쥐에 한정된다. 그러나 인간은 유전적 근친성도 없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19세기 중반, 영국 사회의 최대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가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돕도록 하는 '구민법'이었다. 만약 유전과 변이, 생존 경쟁을 통해 '열등한 개체'가 제거되는 자연선택이 진화의 원리라고 한다면, 전염볌 예방 접종이나 복지정책으로 생물학적 사회적으로 '열등한 개체'를 보호하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문명이 만든 제도로 자연선택의 작용을 저지할 경우 호모 사피엔스는 생물학적으로 퇴화하게 돌 것이다. 구민법에 반대한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진보주주의 자들이 흔히 다윈주위를 혐오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다윈은 국가의 보건정책과 복지제도를 옹호했다. 그는 '종의 기원'을 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이라는 두 번째 저작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구민법은 '본능적 동정심'의 표현이며 이를 외면하는 것은 '극도의 죄악'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열등한 개인은 성 선택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후손을 퍼뜨리기 어려우므로 공중보건정책과 복지제도가 인류의 생물학적 퇴화를 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맹자의 측은지심과 다윈이 말한 '본능적 동정심'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본성이다. 잉것이 이타 행동과 복지제도를 만들어냈다. 유전적 근친성이 없는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생물학적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대뇌피질이 산재한 거울뉴런이다. 

    거울뉴런을 처음 발견한 인물은 이탈리아 파르마대학 소속 생리학연구소 소장 자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 로 알려져 있다. 리촐라티는 원숭이의 대뇌피질에 정교한 측정 장치를 연결한 실험에서 특정한 신경세포가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원숭이가 접시 위에 놓인 땅콩을 손으로 잡으려 할 때만 신호를 보내는 특정 유형의 행동 뉴런을 주목했다. 이 뉴런은 원숭이가 땅콩을 보기만 하면 다른 것을 잡을 때는 활성화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기대한 바와 다르지 않았다. 리촐라티를 놀라게 한 것은 다른 원숭이가 땅콩을 잡으려는 것을 보기만 했는데도 그 원성이의 해당 뉴런에서 신호가 발사된다는 사실이었다. 리촐라티는 연구 대상을 인간에게 확장한 결과 사람에게도 타인을 모방하고 타인이 느끼는 것을 함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거울뉴런이 있다는 사링르 알아냈다. 

    거울뉴런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신경생리학적 장치이다. 거울뉴런 덕분에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표정을 모방할 수 있다 이것이 있기에 아기는 사람들과의 감정적 접촉과 교류를 통해 상호 이해와 연대의 감정을 획득한다. 말을 배우기도 전에 벌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가까운 사람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우리는 평생 동안 거울뉴런이라는 신경생리학적 장비를 다듬고 확장하고 관리하고 개선하고 활용하면서 살아간다. 이기적 욕망과 배타적 경쟁이 자연선택이라는 생물학적 진화 과정으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생존하는 데는 사회적 결속과 유대, 상호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을 이기는 능력 뿐만 아니라 타인과 쉽게 공감을 이루어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타인의 기쁨뿐만 아니라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대가 해고 노동자들의 고통과 죽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눈물이 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임을 입증하는 생물학적 증거가 된다. 

 

진보의 생물학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이러한 의미의 진보주의자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또는 덜 자연스러원 생각과 행동이다.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진화가 인간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과 친척이 아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롭게 나타난 행동 방식이다. 이것 역시 진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혈연 집단에 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행동 일반과 비교하면 새롭고 덜 자연스러운 것임에 분명하다.

   현생 인류는 아프리카의 적도 이남 사바나 기후 지역에 처음 출현한 이래 지구 표면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150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렵채집인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장구한 세월을 '사바나 시대' 라고 하자. 사바나 시대는 겨우 1만년 전에 인간이 농업을 발명하면서 끝이 났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사바나 시대의 생활환경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환경과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변화가 거의 없거나 매우 느렸다. 인간의 몸은 매우 안정적이었던 그 시대의 생활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유리하도록 최적화되었다. 문명 발생 이후 인간이 생물학적 대진화를 겪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수렵채집 시대에 만들어진 몸과 뇌를 가지고 인터넷과 아이패드의 시대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비만이 아름다움과 건강의 적이 된 오늘날, 사람들은 다이어트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수많은 다이어트 방법 가운데 실컷 먹으면서 감량하는 '구석기 다이어트'라는 게 있다. 농업 발명 이전의 식단을 지키는 방법이다. '구석기 다이어트'는 음식의 열량을 따지지 않는다. 육류, 해산물, 달걀, 과일, 견과류, 채소를 마음껏 먹는다. 하지만 곡물, 콩, 감자, 설탕, 전분, 가공식품, 유제품은 먹지 않는다. 실제로 뚜렷한 감량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아이디어는 매우 간단하다. 개별 세포에서 신체 장기까지 몸을 만들고 생명활동을 조율하는 유전자는 사바나 시대에 만들어졌다. 우리 몸의 세포는 사바나 시대 식단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다. 농업 발명 이후 등장한 탄수화물 중심의 식단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1만 년은 유전자의 적응과 생물학적 진화가 일어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따라서 날씬하고 건강한 몸을 갖고 싶으면 구석기 시대 조상들이 먹던 것을 그때와 같은 방법으로 먹어야 한다. 단, 육류는 옥수수 사료가 아니라 풀을 먹고 자란 소와 돼지, 닭, 오리여야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있다. 구석기 시대 동물들이 그렇게 먹었기 때문이다.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가축의 육류에는 오메가-3 지방산이 거의 없고 오메가-6 지방산이 많아서 사람의 건강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구석기 시대에는 그런 고기가 없었다. 

   신체 장기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예민한 것이 뇌다. 몸 전체가 그런 것처럼 뇌도 사바나 시대 생활환경에서 생존하는 데 적합하도록 최적화되어 있다. 사바나 시대 인간은 150명을 넘지 않는 작은 집단을 이루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유전적 친족이거나 친구, 동맹자와 같은 일정한 지역적 공간에서 호혜적 교환 행위를 반복하는 이웃이었다. 개인은 다 가지중심적이지만 생존하기 위해서 그 소규모 종족 집단의 구성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타적으로 행동하면서 협력했다. 반면 완전히 낯선 개체와 집단은 안전과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배타적 적대적으로 행동했다. '집단 내부에 대한 이타주의'와 '집단 외부에 대한 배타주의'는 동일한 사바나 시대 생존 본능의 양면에 불과하다. 

    우리 현대인들도 이 본능에 따라 끝없이 경계선을 긋고 울타리를 세운다. 수렵채집 시대보다 그 울타리가 넓어졌을 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현대인도 수렵채집인과 똑같은 '부족 인간'인 것이다. 혈연의식, 애향심, 동문의식, 애국심은 '집단 내부 이타주의'의 표현이다. 이 본능이 외부에 대해서 적대적인 형태로 표출되면 지역 차별, 학벌주의,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 호전적 침략주의가 된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침공하지 않는 한 70억 인류가 모두 하나로 단결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진보주의를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 이라고 이해하면 그 차이를 비교적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진보는 서민복지를 확대하기 위한 부자증세에 찬성하지만 보수는 반대한다. 진보는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와 문화적 다양성을 옹호하지만 보수는 내국인의 이익과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중시한다. 진보는 동성애에 대해 너그럽지만 보수는 동성애를 혐오한다. 진보는 전쟁에 반대하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옹호하지만 보수는 부국강병을 좋아하고 외부 위협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선호한다. 진보는 여성과 장애인 등 소수자의 권익 보호를 매우 강조하지만 보수는 덜 그렇다. 진보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는 반면 보수는 개인과 가족의 책임을 중시한다. 

   뭉뚱그려 말하면 보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진보는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국가는 그 자체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생긴 지 만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자연인에게는 살인할 권한이 없는데 국가에 대해서는 그 권한을 인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법철학적 논쟁은 국가 그 자체보다 훨씬 더 새로운 것이다. 고작해야 몇 백 년밖에 되지 않았다. 나아가 사형제도가 흉악 범죄를 줄이는 효과가 있는지 여부를 둘러싼 이론적 실증적 논쟁은 더 새로운 것이다. 부당하게 사람을 죽인 흉악범의 인권을 거론하면서 그들을 가두어놓고 피해자 유족의 세금까지 포함된 나랏돈으로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진화적으로 익숙한 것,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따르는 경향이 있는 보수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사형제도를 옹호하며 사형 집행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일까? 왜 일부 사람들은 진보적인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일을 하지만, 진보주의 그 자체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임이 확실하다. 크게든 작게든, 급격하든 점진적이든 '생활 환경은 늘 변화'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이 필요'하다. 모두가 예전의 상황에 맞는 익숙한 생각과 행동만 한다면 개체뿐만 아니라 집단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절멸할 수 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은 인간의 지능을 진화시켰다. 이것이 일반 지능의 발전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이다.

   지능이 높은 사람은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먹이를 확보하기 위한 생존 경쟁과 후손을 퍼뜨리기 위한 성 선택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지식정보화혁명은 이런 흐름을 더욱 뚜렷하게 만들었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지식이 물질적인 부와 사회적 권력의 원천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는 일반 지능이 높은 경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체로 소수파이며 현실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다. 승리해도 그 승리를 오래 지키지 못한다. 역사를 보면 진보주의는 패배를 거듭한 끝에 가끔씩만 승리한다. 수없이 많은 저향과 반란이 참혹한 패배를 당한 끝에 겨우 하나의 혁명이 성공한다. 그 혁명 다음에는 흔히 보수의 반동(反動)이 찾아든다. 그러면서도 사회와 문명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진화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진보적 사상이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더 널리 퍼지고 일상의 행위 양식에 녹아들어간다. 그에 따라 문명은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 정의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