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귀로...인류 종말은 텔레비젼에서 방송되지 않는다 (기후 스토리가 실패하는 이유)
영화 스토리의 참패
우리는 기후 변화를 주제로 한 픽션이 지닌 첫 번째 어려움을 인식할 수 있다. 즉 적대자가 없다는 것이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적대자가 너무 많다. 기후 위기는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저오드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석유 재벌, 육가공 회사, 로비스트들도 있고, 배기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 남반구의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기후를 오염시키는 가장 큰 요인조차 시스템 안에서, 심지어 대부분 민주주의 안에서 움직이며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상황이 그렇게 나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에 지금까지 어느 정도 동의한 집단, 또는 바로 이러한 적대자의 부재로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집단을 어떻게 적대자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로 인해 직접적으로 잠재적 주인공의 약점이 생겨난다. 우리가 기억하는 바와 같이 주인공은 언제나 착학 적대자는 언제나 나쁘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적어도 과학자들과 활동가들이 주인공이 적합할까? 그들의 영웅 정신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정보와 경고를 주는 것? 그것은 흥미진진한가? 집단의 행동 변화나 초국가적 노력을 둘러싼 영웅 여정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서사적인 측면에서 기후 위기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기후 위기는 인간이 만든 것으로 집단적이며, 악당이나 범죄 조족의 잘못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파괴적인 주도권에 기인한다. 기후 위기는 병든 한 시대의 탈선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커져 나갔다. 특출한 악마도 없고 과격한 집단적 이념도 없으며 적대자로 적합한 공격적인 민족 국가도 없다. 그리고 기후 위기에서는 어떤 영웅이든 상대가 악한 정도만큼만 선할 뿐이며 주역을 배정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느 경우든 이 문제는 집단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믿을 만한 영웅으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들은 보다 지속 가능한 세상과 긍정적인 사회적 전환점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과학자, 정치인, 활동가)이다. 그들이라면 사회 전체의 꾸준한 변화를 위해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기후를 잘못 이야기하는가
여러 연구에 따르면 날씨와 기온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기후 위기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좌우된다. 기후 위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믿는 사람들보다 기온을 더 낮게 진술한다. 날씨에 관한 최근의 경험에 대해 질문을 받은 일리노이 주 농부들은 기후 위기를 받아들였는지 아닌지에 따라 극단적인 기상 현상을 강조하거나 이를 대단하지 않게 여겼다. 우리가 속한 내집단이 기후 위기를 믿지 않는데 우리가 그것을 믿을 이유가 있겠는가?
1. 생태와 경제의 경쟁
생태와 경제는 서로 잘못된 방식으로 맞서고 있다. 첫째는 경쟁 마스터플롯이 갈등을 더 직관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며, 둘째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에게 유익한 비용-편익 계산을 하는 것이 인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석유 분야와 같은 화석 연료 경제 부분이 가져올 단기적 손실이 큰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도록 묘사되고, 우리가 세상을 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미래를 이상할 정도로 축소한다. 현 상태(Status Quo) 를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강력한 도전 과제이므로 추상적 차원의 긍정적 변화를 통해 얻는 이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존할 수 있는 지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가장 단순한 주장도 원하는 효과를 얻지 못한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니얼 카너먼이 연구한 이른바 손실 회피(Loss Aversion) 인데, 이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익보다 손실에 훨씬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게 한다. 손실 회피는 특히 생태와 경제 사이의 경쟁으로 조장된다. 사람들은 둘 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경제 쪽이 더 유리해 보이기 때문에 경제를 선호한다. 추상적인 기후 위기는 손실 회피의 완벽한 예이다. 현재의 손실과 미래 이익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구체적인 고통이며, 그에 비해 미래는 본질적으로 항상 불확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를 무조건 만끽하려고 한다.
이로부터 언론의 표현 문제가 발생한다. 말하자면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이 만든 기후 위기에 대해 보고하면서 석유 로비의 중요한 대표자나 보수 정치인은 기후 연구가의 모든 진술에 발언권을 가졌다. 한쪽은 미래를, 다른 한족은 현재를 대변했다. 이런 식으로 양측과 그들의 주장은 사실적으로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기후 위기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묘사, 즉 과학적 인식과 경제적 관점이 서로 대립하였고 양자 간의 합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묘사는 오랫동안 기후 담론을 마치 서로 다른 관점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견해에 바탕을 둔 대화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영어권에서는 이와 같은 잘못된 균형을 거짓 균형(False Balance) 이라고 부른다. 거짓 균형은 엄격한 균형이 편견을 타파하고 현실을 가장 진실하고 공정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거짓 균형은 사실에 대한 왜곡된 표현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과학자들은 연구를 바탕으로 파괴된 미래에 대해 경고하며, 다른 쪽에서는 현재 속에서 계속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
그러나 한 차원 더 깊에 들어가 순전히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경제와 생태의 균형에 관한 생각은 잘못되었다. 어느 정도 온전한 생태계가 없으면 경제 번영의 기회도 없다. 지나친 경제 변화를 요구하지 않기 위해 기후를 조금만 보호하겠다는 타협적 방안을 택하면 기하급수적으로 악화되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2. 우리는 포기해야 하고 많은 것이 많은 것이 금지될 것이다 : 이카로스 플롯
'포기' 와 '금지'라는 한 단어 스토리는 서사적 해석 주권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부풀려서 사용되는 반면, 실태는 그와는 정반대로 이야기된다. '포기'와 '금지'는 주목 경제의 관점에서 볼 때 효과적인 개념들이며, 황색언론은 명목상 '금지'라는 것으로 어떻게 며칠 안에 성공적으로 여론을 조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예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제한'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궐기하도록 유인하고 정치적 에너지를 조종할 수 있는지를 보면 매우 놀랍다.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생활 방식의 여러 측면을 규제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공격이자 나아가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된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기후정책 행동의 중요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서사 지렛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즉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불공정하게 느껴지는 제약들처럼 기후 위기를 적어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기후 재앙이 우리 모두에게 가져올 제약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적대자들(탐욗그러운 기업, 무책임한 정치인 돈에 매수된 과학자 등)과 그들의 범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기후 동화를 믿지 않고 우리 삶의 토대를 확실하게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강력한 내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항변하는 이러한 태도를 갖추면 정치적 관심과 자기효능감을 동원하는 감정이 생겨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감정이 우리를 저항군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 마스터플롯, 약자, 변신. 이것들은 우리가 유익한 반란을 이야기하도록 허용한다.
3. 쾌락주의는 자유와 같다 : 신데렐라 이야기
반항적인 자기주장의 동화는 자신의 파괴적인 생활 방식을 영웅화할 때 더욱 아름다워진다.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성숙한 시민이 자기 계발을 통해 비로소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이에 따라 쾌락주의는 기후에 대한 기괴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골리앗에 맞서는 어린 소년 다윗의 싸움이다. 기본적으로 여기서는 포기 담론의 반전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내러티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예를 들면, 일과 근면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마땅히 인정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삶이 잘못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는 위장된 정당성의 서사다. 즉 우리를 파괴적이고 낭비적인 인물로 묘사되지 않으며, 우리에게 자원과 환경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감정을 서사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적 입장을 취하려면 기후 변화를 강력하게 부인해야 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피터 칸(Perter Kahn)은 '환경에 대한 세대 간 기억 상실(environmental generational amnesis)' 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에 따르면 각 세대는 자신이 자란 환경 상태가 얼마나 오염되었는지에 상관없이 그것을 표준 상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정의는 상대적이며 세대마다 다르다. 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환경에 대해 생각하는 기준선이 바뀌고 있으며, 이 기준선이 하락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이렇게 인식이 왜곡됨으로써 자기의 행동 또한 당연한 중립점이 된다. 말하자면 자기의 행동을 지키려고 할 뿐만 아니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기를 영웅화시키는 쾌락주의로의 도피는 파멸과 죽음에 직면하여 자존감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는 내러티브로 전환하려는 경향과 완전히 양립할 수 있다. 지구 생태계의 붕괴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는 것이 바람직하고 정당하다고 내세우는 내러티브는 역설적으로 특히 매력적이다.
4. 기술이 우리를 구해줄 것이다 : 가난뱅이에서 백만장자로
인간이 진보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버락 오바마는 2008년 대선 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후 위기는 단순한 도전이 아니다. 이것은 기회다" 이로서 오바마는 인간이 자신을 지속해서 새로 발견하고 특히 위협과 위기에 직면했을 때 혁신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내러티브를 사용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지금과 같은 인류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5.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백만장자에서 가난뱅이로 혹은 절반의 맨인홀 플롯
우리는 반감을 풀어보았자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문제에 대해 책임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기후 보호와 관련하여 책임 내러티브가 매우 제한적으로만 적용되는 이유가 여기에서 또한 명확학 드러난다. 즉 우리는 우리도 문제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고 인식하지만 책임을 질 만큼 충분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느끼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기후 위기는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서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미국의 생태철학자 티모시 모튼(Timothy Motton)은 기후 위기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서 우리가 기후 위기를 더 이상 정신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형이상학적 의미로만 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온도계가 기상도를 가리키며 '저계 지구 온난화야!'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튼은 지구 온난화 현상을 독자적인 문제라고 정의하며 이를 '초객체(Hyperopject)'라고 부른다. 우리 자신도 그 일부이기 때문에 개별적인 측면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개의 털 속에 있는 벼룩이 개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기후 위기는 저널리즘적인 묘상서 오랫동안 주로 '맨인홀(Man in hole)' 플롯으로 이야기되었다. 말하자면 현재 상태의 묘사와 인간이 어떻게 구멍에 빠졌는가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어질 뿐, 주인공이 어떻게 구멍에서 빠져나오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고 화석 연료 경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이는 초객체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단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해피엔딩은 제공될 수 없으며, 따라서 희망도 없다. 서사 구조상에서 최저점에 놓인 우리는 모든 동력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면 최악의 경우 문제를 제쳐두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현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며 기후 위기 문제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고 그 영향력을 전달하는 저널리즘이 여전히 필요하며, 이와 함께 행동 변화를 고무하기 위한 건설적이고 해결 지향적인 보도도 필요하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야기는 무엇보다고 연출된 문제해결 능력이며,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 종군기자 빌 블레이크모어(Bill Blakemore)는 미국 언론에서 가장 단호한 기후 저널리스트 중 한 명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기후 변화는 방 안의 코끼리가 아니다. 기후 변화는 우리 모두가 그 안에 갇혀 있는 코끼리이다." 모튼에 따르면, 우리가 기후 위기를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가 현재 처한 대상으로 본다면 사회와 환경 간의 관계가 더 명확해지고 눈에 보이는 피해를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과 더 연관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기후 위기의 영향을 받는 환경의 일부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초객체는 저널리즘에서 감성적인 보도를 통해, 특히 이미지 사용을 통해 포착될 수 있다. 불타는 아마존 우림, 호주, 그리스, 캘리포니아, 캐나다의 화재, 다친 동물과 사람, 훼손된 건축물과 같은 시각적 인상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지하는 것과 다른 환경 및 기후 현실의 추상성을 실제 사례로 전달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우리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가 결과에 대해 논의하고 정치적, 개인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체적인 이미지와 예시가 필요하다.
땅을 정복하라
미국의 인류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정착을 '인류 최악의 실수'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최악의 실수가 우리 자신에게 혹은 다른 모든 사람, 특히 동물뿐만 아니라 정복당하여 점차 멸종 위기에 처한 토착민에게 그 이상의 피해를 줬는지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나 동시에 이 '실수'를 통해 많은 사람이 독보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막대한 번영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더 큰 지식을 얻게 되었다.
지질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이른바 인류세(Anthropocene), 즉 이 행성에서 인간이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첫 번째 시대에 도달했다. 따라서 이야기하는 원숭이는 이 행성에서 가장 똑똑하면서도 가장 멍청한 종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환경에서 무언가를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생활 토대를 파괴하기 위해 이 힘을 사용하는 유일한 종이다.
수십 년 동안 국민경제 내러티브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된 '성장'도 끝없는 증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근간이 되는 자원은 줄어들어거나 심지어 파괴되고 있다. 모든 서구 산업국가에서 한정된 원료와 자연에 막대한 해를 끼치는 대가로 얻는 경제 성장은 자연에서 이뤄지는 대부분의 재생적 성장과 정반대다.
영웅 그레타
2018년 8월 20일 당시 16세였던 한 소녀가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이라고 적힌 푯말을 들고 처음으로 스웨덴 의회 앞에 앉았다. 2019년 2월에 그녀는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 경제포럼에서 연설했고, 2019년 9월에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 기후정상회담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뛰어난 인물들 앞에서 연셜했다. <타임.지는 2019년 말 그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는데, '올해의 인물' 역사상 최연소 인물이었다. 기후 보호에 여성 영웅이 있다면 바로 그레타 틴틴 엘레오노라 에른만 툰베리(Greta Tintin Eleonora Ernman Thunberg)가 여성 영웅 여정의 규칙을 증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걸어온 길은 실제로 몇몇 지점에서 놀라울 정도로 단일 신화와 정확히 닮앗다. 즉 어릴 때부터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남다른 삶을 시작한 한 소녀가 자신이 태어난 망가진 세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다른 모든 사람과 달리 그녀는 우리 시대의 모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녀는 우리와 달리 감정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숫자로만 판단한다. 그리고 이 숫자들은 기후의 관점에서 충격 그 이상이다. 하지만 그년느 다른 많은 사람처럼 무력감을 느끼고 체념하는 대신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 즉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녀는 가장 먼저 자기의 학력, 이어서 자신의 젊음, 사생활, 자유를 걸고 모험을 강행한다. 그레타 툰베리는 의회 앞에 앉은 첫날부터 전 세계를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을 희생한다. 그리고 근는 자신의 여정을 지속해서 이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이미 2019년에 수만 명의 학생들이 처음으로 전 세계적인 학교 파업에 동참했고, 이들은 수년에 걸쳐 자신들의 방식대로 각국에서 활동하며 수백만 명의 지지들을 동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