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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뇌 과학의 모든 역사 - 과거편 Mattew Cobb

by 강대원 2024. 5. 16.

   과거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오늘날의 이론과 체제들이 자리 잡게 된 배경을 자세히 설명하며, 나아가 내일은 어떤 생각들이 지배하게 될지 그려보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상들이 그 당시에는 우리가 현재 이해하는 것들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의 관념들은 아주 복잡한 데다 분명한 근거가 없었던 탓에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상태로 받아들여졌다. 지금 보기에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지라도 모두 한때는 선구적이고 가슴을 뛰게 하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과거의 괴상한 생각들을 우습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깔보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해 보이는 것은 모두 피나는 노력과 치열한 고뇌 덕분에 알아차리기조차 힘들었던 과거의 오류들이 바로잡힌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사람들이 틀리거나 지금 기준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생각들을 받아들였다면 문제는 왜 그랬냐를 이해하는 것이다. 대체로 지금 어떠한 접근법이나 개념에서 모호하고 불분명하다고 느끼는 요소를 보면 왜 그런 생각들이 받아들여졌는지를 알 수 있다. 어쩌면 결정적인 실험적 증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바로 이런 부정확한 이론들 덕분에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진 과학자들이 공통된 틀 안에서 사고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절대로 과거의 생각들이나 사람들을 어리석더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고, 우리 후손들이 보기에는 지금의 생각들도 놀라고 우스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그랬듯 그저 묵묵히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이전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식하는 과학적 개념들은 과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얻은 증거뿐만 아니라 그런 개념이 생겨나게 된 사회적, 기술적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이론과 해석이 틀리거나 부정확하다면 미래의 실험적 증거를 통해 입증될 것이며, 그렇게 우리는 한 걸음씩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힘이다. 

 

1. 심장 - 선사시대부터 17세기까지

 

   선사시대와 약사시대를 통틀어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기록을 살펴보면 과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인간은 뇌가 아닌 심장을 생각과 감정의 근원이라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리스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데 뇌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동물 부분론(Parts of Animals)》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리고 물론 뇌는 오감 중 어느 것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감각의 소재이자 원천은 심장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 쾌락과 고통을 포함한 모든 감각은 명백히 심장에서 비롯된다.

  

    심장은 우리가 다양한 감각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혈액의 원천인 반면 뇌는 자체적으로 혈액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심장은 모든 대형 동물에게 있지만 뇌는 고등동물만의 전유물이다. 마지막으로 차갑고 움직임이 없는 뇌와는 달리 온기가 있고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심장이 생명의 핵심 요소를 지니고 있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뇌와 생각 사이의 연결성을 증명해줄 어떠한 실질적인 근거도 없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서의 논리적인 주장은 당대 사람들에게 코스 의학 전문학교에서 제작한 문헌들만큼이나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뇌와 심장 중 무엇이 생각의 근원인지는 더 다툴 여지도 없었다. 지구 곳곳에서는 계속해서 전과 다를 바 없는 삶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생각은 심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심장과 뇌 사이에서 고뇌한 고대 철학자들

 

인체를 직접 해부하고 연구한 덕분에 (알렉산드리아의)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는 뇌와 신경계에 관해 여러 가지 매우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헤로필로스는 척수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며 신경들이 어떻게 뻗어나가는지를 알아냈을 뿐 아니라 인간 뇌의 핵심적인 두 개 부위, 즉 피질(뇌의 거대한 두 덩어리)과 소뇌 (뇌의 둣부분에 붙어 있는 영역으로 그는 이곳이 지능을 담당한다고 믿었다.)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규명해낸 듯하다. 그는 또한 감각기관에 연결된 신경과 행동을 유도하는 운동신경을 구분했으며, 이를 통해 시신경은 내부가 텅 비어 있어 어떤 특별한 공기가 이 공간을 기나감으로써 우리가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이른바 감각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토록 정확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의 업적은 생각과 감정의 근원이 뇌냐 아니면 심장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서구 문명 명사상 가장 큰 위업을 떨친 사상가 중 한 명이 뇌의 역할을에 관한 확실한 증거를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400년이 지난 뒤였다. 바로 갈레노스(Galenos)의 등장이다. 로마의 시민 갈레노스는 서기 129년, 현재는 터키 서부에 속하는 당시 페르가몬의 어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갈레노스의 흥미를 끈 핵심 주제 중 하나는 뇌의 역할이 무엇이며 생각과 영혼이 머무르는 곳은 어디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뇌가 행동과 사고의 기본이 되는 기관이라고 확신했으며 동물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뇌는 프네우마(Pneuma)라는 특별한 공기를 생성하는데, 뇌를 다칠 경우 이 공기가 밖으로 새어나가기 대문에 무의식 상태에 빠지게 되며, 다시 뇌부에 양이 쌓이면 의식이 돌아오게 된다. 또한 육체의 움직임은 뇌에서 생성된 공기가 내부가 텅 빈 것으로 보이는 신경들을 타고 흐른 결과라고 말했다. 그의 해부학 연구 결과들은 대부분 인간이 아닌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도출되었디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바와 달리 신체의 모든 신경이 심장에서 뻗어나온 것이 아니라 뇌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갈레노스가 제시한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사상가들의 권위와 일상 속의 경험이 지니는 힘이 너무나도 강했던 탓에 로마에서조차 새로운 뇌 중심 관점이 기존의 관념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갈레노스의 연구가 시사하든 해부학 및 실험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다양한 견해를 서로 나누고 전달함으로서 지적으로 개방되어 있고, 과거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지식을 쌓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 환경은 수백 년이 흐르도록 다시 조성되지 않았다.

 

   이븐 시나 (Ibn-Sina)는 뇌 또는 척수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갈레노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육체의 모든 움직임과 감각의 원천은 심장이라는 견해를 고집했다. 이 같은 관점은 지성의 근원으로 주로 심장을 언급하며 성경과 마찬가지로 뇌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코란과도 일치했다. 

    마주시 (마주시 알리 이븐 알 압바스)는 갈레노스의 글 중에서 특히 뇌의 구조와 역할에 대해 서술한 문헌들을 번역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핵심 주제였다. "뇌는 정신활동을 하는 개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뇌 내부에는 기억, 추론, 지능이 자리잡고 있으며 뇌를 통해 힘, 감각, 수의운동 능력이 신체 곳곳에 배분된다."

 

(뇌실 기능의 국재화론을 표현한 그레고르 라이쉬의 삽화...지각과 상상력은 앞쪽에 인지 기능은 중앙에 기억은 뒤쪽에 위치해 있다.)

 

   마주시는 갈레노스가 제시하지 않은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뇌에 있는 세 개의 공동, 즉 뇌실은 심장에서 생성되어 혈액을 타고 뇌로 이동한 복수의 동물혼(animal sprits;여기서 동물(animal)이라는 용어는 '동적이다 animated'와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으며, 심장과 마음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니무스 animus 를 의미한다.)으로 채워져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각각의 뇌실은 저마다 다른 심리적 기능을 갖추고 있는데, "전측 뇌실 안에 담긴 동물혼은 감각과 상상을 자아내고, 중앙 뇌실에 있는 동물혼은 지능과 추론 능력을 화하며, 후측 뇌실로 보내진 동물혼은 운동과 기억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었다.

    마땅한 근거는 없었지만 이 견해는 1,000년이 넘도록 유럽과 중동지역에 걸쳐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았다. 뇌실 기능의 국재화론 (vnetricular localization)은 4세기에서 6세기 사이, 1,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24종 이상의 버전이 파생되며 그 자체가 자명한 진리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이론을 아무런 의심 없이 수용했던 인물들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로저 베이컨, 토마스 아퀴나스, 아베로에스, 이븐 시나를 비롯한 유럽과 아랍권의 위대한 사상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중세의 지식인들, 인간의 마음을 해부하다

 

 1543년에는 우주와 그 안의 생명체들을 향한 우리의 시각을 완전히 바꾼 전혀 다른 분야의 책 두 권이 출간되었다. 첫 번째 책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저술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로 두 세기도 더 전에 아랍의 천문학자들이 발전시킨 이론들을 활용하여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수학적 모형을 서술햇다. 두 번째는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가 쓴  《사람 몸의 구조》다. 총 일곱 권에 걸쳐 7백 쪽이 넘는 분량으로 풀어낸 이 책은 지식과 미학을 결합하여 당 대 그 어떤 문헌보다도 인체 해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독자에게 제공했다. 특히 베살리우스는 새로운 인쇄 기술을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해부 경험에 기초한 인상적인 목판화를 2백 점 이상 수록하여 본문의 질을 한층 높였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가 동물혼이 뇌로 흘러들어갈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던 혈관망인 괴망(rete mirabile0을 보지 못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베살리우스는 대담하게도(그리고 정확하게) 갈레노스가 틀렸으며 해당 구조물은 인체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직접 부검에 참관하여 인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미래에는 해부학 교제를 덜 맹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베살리우스는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와 인체, 특히 뇌가 작동하는 기제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심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그는 메스의 한계를 절감했다. 세밀한 인체 해부를 통해 구조는 알 수 있었지만 뼈나 힘줄, 신경 같은 뻔한 경우들을 제외한 기능적인 면에서는 실질적으로 어떠한 통찰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어려움은 인간의 행동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다른 동물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크게 드러났다. 그는 "양, 염소, 고양이, 원숭이, 개, 새를 해부했더니 뇌의 구조가 인간의 것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베살리우스의 저서에 실린 인간 뇌 해부도

 

    비율 면에서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들의 뇌보다 훨씬 크기는 했으나 베살리우스는 인간과 그 외 척추동물들의 뇌 구조 사이에서 어떠한 질적인 차이도 찾아내지 못했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명백한 행동적, 심리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어떤 사실도 밝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의 해부 연구는 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당시 지배적이었던 심리학의 뇌실 이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했다. 

    베살리우스의 뇌 연구는 심장이 아닌 뇌가 생각과 움직임의 근원이라는 발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매우 빈약했다. 

    인간이 사고하는 데 있어 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이 모든 시행착오는 사상가들이 심장이 아닌 뇌가 핵심 기관임을 깨닫는 과정이 결코 어느 한 순간의 '뇌 중심적 통찰'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누가 보더라도 심장에 비해 훨씬 복잡하게 생긴 뇌의 특성은 생각과 감정이 뇌에 위치해 있으리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했지만, 관습의 무게와 일상 속 경험의 힘 탓에 16세기와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조차 이와 전혀 상반되는 관념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시의 상인》 3막에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혼란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말해주세요, 사랑은 어디에서 태어나나요?

    심장인가요 아니면 머리인가요?

 

 

2. 힘 -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1620년대에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는 "심장이 그저 근육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햇다. 하비는 뇌를 '감각기관'이자 '신체에서 가장 값진 구성 요소'라고 칭하며 뇌가 복잡한 구조물임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그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옳다고 여겼으며 혈액이 심장에서 생성된 어떤 신비로운 영혼을 운반한다고 생각했다.

   뇌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는 1620년대와 1630년대에 뇌를 직접 해부했던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데카르트 (Rene Descartes)다. 1633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가 종교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일로 데카르트는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그의 저술들은 1662년에 이르러 결국 유작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여타 많은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 역시 심장이 정념의 발원지라는 주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도 없다." 고 일축했다. 뇌를 대하는 그의 관점은 기존의 사상들보다 훨씬 참신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의 몸이 마치 기계처럼 작동하고 여기에 뇌가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겼으며, 나아가 동물기계(Animal machin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인간은 영혼이 있고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며, 이를테면 인간의 뇌와 유인원의 뇌 사이의 주요 해부학적인 차이는 뇌의 기저에 있는 콩알만 한 크기의 구조물인 송과선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이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송과선이 심장에 의해 공급된 혈액에서 동물혼을 생성하여 정신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곳이 우주를 구성하는 두 개의 기본 요소인 물질적인 것(res extensa 육체)과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영혼)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데카르트는 대뇌피질로 올라가는 신경들이 송과선을 이리저리 흔들리게 만들어 송과선이 "우리가 지각적으로 구별할 수 잇는 사물의 차이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임으로써 여러 사물들을 지각하고 그에 다라 반응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런 신경 따위는 존지하지 않으며, 1660년대에 그의 주장이 세상에 알려지자마나 해부학자들은 그가 인간의 고유의 구조물이라고 여겼던 송과선이 사실상 모든 척추동물에게 발견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런 데카르트의 사상에서도 꾸준히 영향력을 떨쳤던 한 가지 측면이 있는데, 바로 동물혼이 어떻게 신경을 타고 움직였는가에 관한 설명이다. 다른 많은 사람이 그랬듯 그 또 한 동물혼이 '유체'로 이루어져 이씅며 빠르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전 세대의 사상가들과 달리 데카르트는 이러한 움직임이 어떻게 인간의 행동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설명까지 제공했다. 당시 프랑스 왕족들의 정원에서 유행하던 수압식 자동 기계장치 또는 오토마타(기계장치를 통해 움직이는 인형이나 조형물)와 같은 형태로 작동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장치들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대형 동상으로 물과 공기가 금속 몸체에 주입되면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초목 사이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말을 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이 기계장치의 움직임과 인간 및 동물의 행동 사이에서 명확한 유사성을 도출해냈다. 

   데카르트는 이 모형을 이용하여 우리가 '반사운동'이라고 부르는 단순한 행동들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는 거인 꼬마가 자신의 발을 끌어당겨 불에서 떼어놓는 듯한 그림을 제시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는 동물혼이 신경을 타고 발에서부터 뇌로 올라갔다가 다리에 있는 근육으로 다시 내려왔기 때문에 이루어진 동작이다. 

 

반사운동을 일으키는 절차에 대한 데카르트의 설명. "… 불의 미립자들은 힘을 가지고 있어 그것에 닿은 피부로 옮겨가고, 그러면 그곳에서 연결된 가는 끈 cc 를 잡아당기고, 동시에 이 끈은 다시 연결된 기공 de 의 출입문을 당겨 연다. 그러면 구멍 (cavities) 내부에 있던 생기 (animal spirit) 를 즉시 신경으로 흘려보내 근육에 들여보냄으로써 운동을 일으킨다. …" (Descartes 1664 ; Hall 1972:34)

 

 수 천 년 동안 사상가들은 동물혼(생기) 이 유체나 바람처럼 움직인다고 주장했도, 이 같은 형태의 움직임이 가진 빠른 속도 및 손에 집히지 않는다는 성질 때문에 제법 그럴 듯한 비유로 받아들ㅇ졌다. 오토마타의 수압식 동력 체계를 활용한 데카르트의 비유는 이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지만 신경 안에 있는 영혼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둘러싸고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갈레노스가 주장한 신경 속 특별한 공기인 프네우마라는 관념 또한 혼란을 부추겼다. 이에 관해 스테노는 1665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것이 (...) 송과선과 분리된 특별한 물질일 수 있을까? 장액이 그 원천일 수는 없을까? 혹자는 주정(에탄올)에 비유하기도 하며, 실제로 빛과 유사한 물질일 가능성도 있다. 요컨데 일반적인 해부만으로는 동물혼과 관련된 문제를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해결할 수 없다. 

 

    스테노가 신경의 기능에 대해 현존하는 모든 설명을 자신 있게 일축할 수 있었던 데는 최신기술을 활용한 연구가 일조했다. 바로 현미경이다. 

    스바메르담의 실험은 프네우마라는 공기에 의한 가설이나 수압식 모형 모두 신경의 기능을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그 대신 여에는 우리가 만질 수 없는 어떤 움직임이 관여하고 있는 듯했다. 신경을 자극하면 마치 진동처럼 근육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났기 대문이다. 스바메르담은 적절한 비유를 찾아보려 애를 썻지만 어쨋든 중요한 사실은 기존의 설명이 틀렸으며 물리적으로 신경을 자극함으로써 인위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함을 그가 증명했다는 것이다. 

 

뇌는 기계장치인가

 

   해부와 더불어 혈관에 특수 물질을 주입해 뇌 영역들 간의 연결성을 관찰하는 염색 기법을 통해 윌리스는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이 "외부 경계를 이루는 영역들이 접히면서 조성된 텅 빈 공간"에 불과한 뇌실이 아니라 뇌 자체를 구성하는 물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베살리우스가 주장했듯 뇌실은 액체로 채워진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윌리스는 기억이 피질의 주름에 깃들어 있다고 주장했으며, 소뇌는 심장박동같은 의지나 의도에 관계없이 나타나는, 불수의적 활동 (의식적인 통제나 의도와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신체 기관의 활동) 에 관여하고 대부분의 척추동물에 공통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대규모의 비교해부학 실험 및 뇌의 각 영역과 신체 다른 여러 부위 사이의 연결성을 관찰ㄹ한 결과에 기반하여 도출한 결과이었다. 인간의 뇌 표면은 수많은 주름이 잡혀 있는 등 매우 복잡한 반면 고양이의 뇌는 상대적으로 단순했으며, 물고기와 새의 뇌는 그보다도 더 단순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사상가들이 이야기했듯 윌리스 또한 피와 심장을 생명을 이루는 필수 요소들의 원천으로 상정했다. 하지만 영혼들이 어떻게 행동을 만들어내는지에 관해서는 다소 모소한 의견을 내놓았다. 

   뇌가 단숞히 기계와 닮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종의 기계장치라는 스테노의 관점은 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관점의 변화오 궤를 같이한다. 철학자 및 의사들은 신체를 기계에 빗대어 표현하는 데 점차 익숙해졌다. 예컨데 1641년에는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다음과 같은 수사적 의문을 던졌다. "심장은 태엽에 지나지 않고, 신경이란 수많은 끈이며, 관절이란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수많은 톱니바퀴일 뿐이지 않는가?"

    홉스가 기계와 해부학적 구조 사이에서 도출해낸 유사성은 신체의 다양한 물리적인 기능에 제법 합리적으로 들어맞았다. 

    홉스는 엄격한 유물론적 접근법을 내세웠는데, 영혼이 '무형의 물질'이라던 데카르트의 모순된 관념을 일축하고, 그 대신 사고력을 갖춘 것이라면 응당 물질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유하는 물질(thinking matter) 말이다. 

   철학계에서는 많은 거물이 마음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에 반댛했다. 1712년,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는 말년에 집필한 글 중 하나에서 사유하는 물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념적인 시각을 드러냈는데 과연 그것이 어떤 원리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는 일이 가능한 구조를 갖춘 기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비율을 유지하되 규모만 확대해서 마치 우리가 방앗간에 들어가듯 그 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분명히 서로 밀고 누르는 부품들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지각 과정을 설명해주는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훗날 라이프니츠의 방앗간 논증으로 알려졌으며, 당대의 기술에 알맞은 새로운 버전으로 적절히 업데이트되면서 오늘날까지 수 백 년 동안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는 논증으로 이어진다. 

 

사유하는 물질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들

 

   《인간지성론》 3부에서 로크는 생각의 기원으로서 비등한 가능성을 품은 두 가지 가설을 간략하게 제시했다. 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물질을 창조해냈거나, 자력으로 활동하지 못하는 물질에 생각이라는 무형의 물질을 갖다 붙였을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로크는 특유의 장황하고 복잡한 산문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에게는 물질사유라는 개념이 있지만 일개 물질이 사유하는 존재일지 아닐지는 결코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품고 있는 관념을 가지고 사색해보았자 신의 계시가 있지 않는 한 우리로서는 전지전능하신 신께서 지각하고 사유하는 힘을 어떤 물질 체게에 알맞게 부여하신 것인지, 물질에 사유하는 무형의 물질을 연결 지어 가져다 붙인 것인지 밝혀낼 수 없다. 그런 연유로 관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신께서 하고자 하실 경우 물질에 사유하는 능력을 덧붙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편이 물질에 사유하는 능력을 지닌 또 다른 물질을 덧붙인 것이라 믿는 쪽보다 우리가 이해하기는 바와 가까울 터이다. 

 

    로크의 주장은 홉스나 캐번디시의 주장보다는 훨씬 더 단정적이고 온건했지만, 만약 물질이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존재라면 영혼도 결국 물질이라는 뜻이고 이는 곧 영생이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합을 의미학 대문에 수많은 보수와 사상가가 이를 불경스러운 논쟁으로 받아들이고 분노했다. 아일랜드의 어느 신학자는 로크의 글을 두고 "틀림없이 기독교에 대항하려는 악마의 마지막 대분투"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사유하는 물질에 대한 도 다른 갈래의 반대 의견은 우주가 입자들고 구성되어 있다는 신념이 점차 커져가던 배경 속에서 생겨났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했다. 모든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할 때, 사유하는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들은 반드시 무언가 특별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원자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므로 뇌를 구성하는 것 또한 그 무엇도 특별할 수 없다. 많은 이가 이러한 역설을 사유하는 물질이라는 개념에 맞서는 치명적인 논증으로 받아들였다. 즉 모든 물질이 사유할 수 있든지, 아니면 그 어떤 물질도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부 사상가들은 이 같은 가능성을 포용하기도 했다. 영국의 의사였던 프랜시스 글리슨 (Francis Glisson)은 모든 물질의 근본적인 특성은 자극감수성(irritability;현대 용어로 보자면 자극에 대한 '반응성' 정도가 동의로로 쓰일 수 있다.) 인데, 바로 이것이 지각이 이루어지는 기본 바탕이며, 곧 전 우주가 어떤 방식으로든 지각이 있는 존재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범심론이라고 불리며 의식의 특성과 기원에 관한 현대의 일부 신경 과학적 논쟁에서 지속적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벤틀리는 종류를 막론하고 사유하는 물질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신이 사유하는 물질을 창조해쓸 것이라는 로크의 가설에 반박하며 조물주의 전지전능함까지 부정하고자 했다. 그는 "제아무리 전능한 신이라도 생각하는 육신을 창조할 수는 없으며, 이는 신의 힘이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과 사유라는 두 개의 개념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클라크는 리처트 벤틀리가 수십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물질 체계가 지닌 각각의 성질은 해당 체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성 요소에 존재하기 때문에 인체의 어느 한 부분이 의식을 지녔다면 당연히 모든 입자들이 그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콜린스는 다음과 같이 창발성 (하위체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각각의 하위체제가 모였을 때 상위체계에서 새롭게 발혀하는 특성)이라는 속성을 통해 뇌 안의 입자 조직이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하려고 애썻다.

   

    뇌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가 결합되기 전에도 사유하는 행위에 기여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들 각각이 개별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동안에는 다른 존재들 이상의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소.

  

    결국 이러한 논쟁은 물질의 본질 자체를 다루게 되었으며, 특히 콜린스가 설명한 것처럼 각각의 구성 요소가 지니지 않은 특성을 전체가 지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으로 옮겨갔다. 

    사유하는 물질이라는 관념이 시사하는 점 중에서 특히 수많은 사상가를 괴롭힌 것은 인간이 기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유사점들을 논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매우 부도덕한 일로 여겨졌는데, 이는 곧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문을 품는 행위로 비쳤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내리는 선택이 영혼이 아닌 기저의 물질적인 과정에서 비롯되었다면 도덕성이 붕괴될 것이라며 논쟁이 이어졌다. 여러 비평가들은 유물론자들이 인간을 기계에 비유하여 순진한 청년들에게 자유분방한 성행도응ㄹ 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뇌와 신체의 연결고리를 찾아서

 

   1752년, 부르하버의 제자였던 스위스의 엄격한 칼뱅주의자 알브레히트 폰 할러 (Albrecht von Haller)는 신경 및 뇌의 기능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생각햇다. 하러는 생체 조직이 지니고 있는 자극감수성과 감각성(sensibility)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속성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움직임은 자극감수성(글리슨이 사용한 용어를 차용했다.)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근육이 수축할 때 관찰할 수 있으며, 선천성 힘(contractile force)이라는 수축성 힘을 수반하는데, 이는 스바메르담의 개구리 다리 실험에서처럼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신경은 감각성을 나타내며 신경성 힘(nervous force) 에 수반된다. 할러에 의하면 이 힘은 죽음과 동시에 소멸하며, 그의 실험이 보여주듯이 신경을 묶거나 뇌를 손상시키거나 아편을 처방함으로써 억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할러는 이후 입장을 바꿔 신경에는 분명 뇌의 피질에서 생성되어 '신경의 작은 관'을 타고 내려가는 어떤 액체가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신경액(nervous liquor)'는 "감각과 운동의 수단으로써 극도로 유동적이라 외현적으로 아무런 지체도 없이 감각의 인상이나 자유의지가 내리는 명령을 목적지까지 운반한다"

   또 다른 부르하버의 제자 에든버러대학교의 스코틀랜드 출신 의사 로버트 휘트(Robert Whytt)는 할러와 하틀리의 관점을 모두 반박했다. 휘트는 신경과 뇌를 통해 운용됨으로써 육체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무형의 '지각 능력 원리(sentient principle)'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독자를 사로잡은 금서, 《인간기계론》

 

   라 메트리는 "영혼의 모든 능력은 뇌 및 전신의 특정 조직 구조에 너무나도 많이 의존하고 있어서 그 조직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물질은 실존하며, 그것이 바로 뇌였다.

   그의 후원자였던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 따르면 "사유할 수 있는 는력은 기계 조직이 만들어낸 결과에 불과하다"는 라 메트리의 깨달음은 1744년 그가 열병을 앓던 시기에 찾아왔다. 1746년에 라 메트리는 시험 삼아 자신의 생각을 글로 펴냈는데, 즉시 프랑스 권위자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잽싸게 네덜란드로 달아났다.

    그럼에도 라 메트리는 굴하지 않고 마음의 물질적 근거에 대한 연구에 더욱 몰두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레이든에서 1747년에 익명을 출간된 《인간기계론》이었다. 

    《인간기계론》 에서 라 메트리의 첫 번째 화두는 정신 건강 및 신체의 상태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이었다는 것이다. 라 메트리가 밝힌 일부 증상은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과소 괴이해 보인다. 이를테면 "자신이 늑대 인간이나 수탉, 혻은 뱀파이어로 변했다고 상상하는 사람" 이라는 진단 기준도 눈에 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정서적 혼란, 불면증의 끔찍한 영향력, 시지절단술을 받은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환상지 증후군 (수술이나 사고로 갑자기 손발이 절단된 사람이 사라진 손발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감각을 생생하게 느기는 증상)의 비극 등을 뚜렷한 공감과 연민의 시선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라 메트리의 사상 뒤에는 사실 다소 오래된 관념들이 있다. 그는 "인간기계의 태엽 장치들"이라고 칭한 불수의운동에 촛점을 맞추어 뇌의 작용 기제를 설명했지만 시계에 빗대어서는 모호하게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물질이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었던 라 메트리는 생각이란 생명체에게만 특별히 존재하는 어떤 미지의 힘이 작용한 결과라는 가설로 돌아가 "조직화된 물질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직화되지 않은 물질과 구별되는 동기(motive)의 원리를 타고나며 (...) 이는 물질과 인간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의 뇌와 육체에 대한 놀라운 관념을 만들어냈고, 그에 따르면 인간의 뇌와 육체는 "스스로 태엽을 감는 기계, 말하자면 영구적인 운동의 살아 있는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 인간은 각자의 움직임에 의해 작동하는 태엽 장치들의 집합체"였다. 현대의 비평가들의 인식했듯 이 같은 생기론 (생명현상이 물리적인 요인 외에도 어떤 초자연적인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이론)적인 관점은 《인간기계론》 이라는 극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라 메트리가 유물론적 접근접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음을 시사한다.

    영국 출판 역사상 가장 큰 악명을 떨친 책 중 하나는 주인공의 이름을 딴 《페니 힐》 이다. 이 책은 《인간기계론》이 나오고 1년 뒤에 출간되었는데, 출간된 지 12개월 만에 저자인 존 클리랜드(John Cleland)는 신민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로 고발되었으며 책은 금지되었다. 

    설명이 모호하긴 했지만 라 메트리의 저서에서 핵심어었던 기계 대한 비유는 복잡하고 정교한 기계 및 오토마타를 향한 관심이 커지던 당시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졌다. 특히 소형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생동감이 더해진 태엽식 기계들은 데카르트가 언급했던 수압식 동상 따위는 한참 전에 뛰어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1738년에는 프랑스의 발명가 자크 드 보캉송 (Jacques de Vaucanson)이 기계식 플루트 연주자를 만들고 뒤어어 스스로 드럼 반두를 넣는 피리 연주자, 움직이고, 먹고, 배변할 수 있는 소화하는 오리라는 기계까지 만들어 파리 주민들을 놀라게 했다. 

    어느 누구도 이 같은 오토마타가 살아 있거나 생각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행동 양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오토마타들의 불쾌한 능력은 이 기계들의 째깍거리는 내부 부품이 어쩌면 우리의 뇌와 육체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했다.

 

     18세기에는 뇌의 본질적인 역할에 대한 관념이 점차 학술적이고 대중적인 생각에 기초하게 되었다. 영국 작가 새뮤얼 컬리버(Samuel Colliber)는 "뇌에 감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보편적으로 합의된 받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근 반 세기가 흐른 뒤, 데이비드 하틀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영국의 위해한 화학자이자 비국교파 성직자 조지프 프리스틀리 (Joseph Priestley)는 생각이란 "신경계, 더 정확히는 가 지닌 속성이다." 라고 선언했다 요크셔 출신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로 그는 "나의 견해로는 뇌가 사유한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그것이 하얗고 부드럽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할 만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가 추측하는 한 사유하는 능력은 언제나 뇌의 특정 상태를 수반하며 서로 상응한다. 이것이 바로 어떤 속성이든 물질에 선천적으로 내제되어 있다고 믿는 이유다. 뇌가 파괴어도 사유하는 능력을 유지하는 이의 사례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기능이 저해되거나 손상되었을 때는 뇌의 균형에 장애가 발생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으므로 후자에 전자가 자리잡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기계에 빗댄 설명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특별한 힘과 감각성이 우세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이르기까지 과학적 사고의 변화는 18세기 전반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다. 17세기, 전 우주를 수학화하여 바라보는 물결에 밀려 사라진 듯했던 생기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뉴턴과 다른 학자들의 손에 성공적으로 증명되었던 기계론적 관점 또한 한계를 드러냈다. 이를테면 뉴턴의 중력이론은 어마어마한 예측력을 갖추기는 햇지만 어느 누구도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지금도 여전히 모른다.) 중력은 실재하지만 관찰할 수 있을 뿐, 붙잡아두거나 세부적인 구성 요소들로 분해할 수 없었다. 생리학 분야에서는 기계 모형을 활용해 신체의 열을 설명하려는 실험이 실패했으며, 17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생기론적인 해석이 더욱 힘을 얻어 라 메트리가 주장한 것처럼 살아있는 육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에 뭔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경의 기능 및 마음의 본질에 대한 관념에서도 기계를 이용한 비유가 우위를 차지했지만 이 같은 비유도 새롭게 밝혀진 자극감수성과 감각성이라는 특별한 힘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신경에 존재하는 이러한 힘들은 압력이 주어지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수압식 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건적으로 ㅂ라현하며 오직 특정한 환경에서만 관찰이 가능햇따. 1784년,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게오르게 프로차스카(George Prochaska)는 "부싯돌과 강철 사이에 마찰이 가해지지 않는 한 불꽃이 강철 또는 부싯돌 안에 잠재하고 있듯, 싱격성 힘 또한 자극이 가해져 촉발되기 전까지는 신경계의 활동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잠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조건성 비기계적 관점은 앞서 알려진 신경 내의 힘들이 대체 어떻게 그 같은 역할들을 충족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불어일으켰다. 수력도, 기압도, 진동도 이를 설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이 잠재적 힘의 정체를 밝힐 만한 흥미진진한 단서가 존재했다. 그것인 신체에 극적이고 무시무시한 영향을 미치며 생명 그 자체와도 직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현상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전기였다.

 

3. 전기 -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1749년에 데이비드 하틀리는 점차 커져가던 전기의 매력과 신경의 기능에 관해 개략적으로 제시했던 사상을 연관 지어 "전기는 진동 이론과도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6년 뒤, 스위스의 사상가 샤를 보네(Charles Bonnet)는 한걸음 더 나아가 "동물혼이 빛이나 전기적 물질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아마도 현재 우리가 신경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되는 '전달'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것도 보테였을 것이다. "신경들은 그저 경탄할 만큼 빠른 이 물질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실일까?" 라고 말이다. 1760년에 보네는 신경이 "신비성과 기동성에 있어 빛에 필적하는 액체"를 담고 있다고 주장하며 다시금 전기와 신경 기능 간의 연관성을 상기시켰다. 다만 그는 자신이 이 같은 주장을 하는 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우리는 동물혼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 동물혼은 이를 여과하거나 만들어내는 혈관보다도 훨씬 더 우리의 감각과 기구로는 밝혀낼 수 없는 범위에 있다. 오직 추론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를 동물혼과 전기적 액체 사이의 어떤 유사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유사성은 주로 이 액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비범한 속성에 기초한다. 그 속성이란 특히 이동할 때의 빠른 속도와 자유로움으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실을 따라서, 또는 물줄기를 통해 이동할 때 드러난다. 

  

      175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던 볼로냐는 신경이 기능하는 데 전기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두고 잇달아 벌어진 치열한 논쟁의 주 무대가 되었다. 마르크 칼다니와 펠리체 폰타나 (Felice Fontanan)는 자극감수성이 해답을 제시한다는 할러의 관점을 지지한 반면 다른 이들은 전통적인 동물혼에 대한 관념을 옹호하되 보네의 주장에 따라 동물혼이 전기의 형태를 띤다고 여겼다.

 

동물 전기 실험으로 감각의 근원을 파헤치다

 

   볼로냐 출신 의사 루이지 갈바니 (Luigi Galvani)는 프리스틀리나 다른 학자들이 30년 전에 했던 연구를 이어 분리된 개구리 다리의 움직임을 통해 라이든병에서 방출된 전기에 동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791년에 천둥이 치는 날 전하를 띤 대기 또한 근육의 수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신경이 전기에 극도로 예민한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갈바니의 가장 흥미로운 발견은 전하를 공급할 만한 외부적 요인이 없는 상황에서도 근수축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일이다. 그보다 1세기 이상 앞서 스바메르담이 메스로 개구리의 신경을 건드리면 신경에 붙어 있던 근육이 수축한다는 것을 밝히며 이를 자극감서성이 작용한 결과라고 설명했던 바 있다. 갈바니 또한 유사한 현상을 발견했는데, 개구리의 근육이 철판 위에 놓여 있고 그에 연결된 선경이 은이나 다른 금속에 닿아 있을 때 수축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에 갈바니는 신경에는 일종의 내재적 전기가 흐르고 있으며 이것이 금속을 통해 근육으로 전달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효과는 개구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갈바니는 이러한 실험이 "동물의 몸 대부분에 내재되어 있지만 근육과 신경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른바 동물 전기 (animal electricity)의 존재를 보여주며, 이는 전기가오리나 다른 유사한 어종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전기와 근본적으로 같은 것으로서 피질에서 생성된 뒤 혈액에서 추출되어 신경으로 들어간다고 주장했다. 어떤 의미로는 이전과 별로 달라진 점이 없었다. 수백 년 전 동물혼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관한 생각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1793년에는 토리노의 의사 유세비오 발리 (Eusebio Valli) 가 동물 전기라는 새로운 개념이 해묵은 동물혼을 대체했다고 주장하며 갈바니의 주장을 열렬히 지지하고 보충했다. 발리는 신경이 전기에 기반하여 기능한다면 전기가오리의 전기 기관과 마찬가지로 다른 조직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특별한 구조물을 갖추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뇌, 척수 그리고 신경은 특정한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이들 내부의 전기적 양상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에든버러의 의사 리처드 파울러 (Richard Fowler)가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갈바니가 제안한 동물 전기 효과는 신체조직이 두 개의 각기 다른 금속에 닿아 있을 때에만 발생하는 듯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판점은 이탈리아 파비아대학교 소속 알렉산드로 볼타(Alessandro Volta) 가 진행하던 연구의 핵심이기도 했는데, 그는 단지 두 가지 다른 금속에 닿기만 해도 약한 전류가 발생해 개구리의 근육을 수축시킬 수 있음을 증명했다. 아울러 실험에서 관찰한 근수축은 그저 두 가지 금속에 닿아 발생한 전기자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며 동물들의 체내에서 전기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던 갈바니의 주장을 즉시 반박했다. 

    볼타의 비난에 기분이 상했던 갈바니는 자신의 조카 지오바니 알디니(Givanni Aldini)와 함께 실험을 통해 금속의 접촉은 일절 없이 겉으로 노출된 근육에 신경이 닿기만 해도 근수축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같은 결과는 2년 뒤 알렉산더 훔볼트(Alexander Humboldt)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볼타는 이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 경우에도 조직 외부의 액체 등 어떤 외부 요소가 근수축을 일으키는 데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볼타에 의하면 육체는 철저히 수동적이며 이른바 혼합 물질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생성된 외부의 전기자극에 반응하는 것일뿐이었다. 

    이게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갈바니가 맨 처음 두 개의 금속을 가지고 진행한 실험의 결과는 두 가지 종류의 금속이 지닌 가기 다른 전자친화도(진공 중에 떨어져 있던 중성원자와 전자가 접근하여 결합할 때 방출되는 에너지) 가 전류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며, 갈바니와 훔볼트가 금속을 사용하지 않고 진행한 실험은 손상된 조직이 신체 다른 부위에 비해 음전하를 띰으로써 전류가 흐르게 되는 손상전류를 발생시켰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갈바니가 동물의 체내에 일종의 전기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올았으며, 그가 흐트러진 평형상태(disturbed equilabria) 라고 칭했던 현사은 전류를 흐르게 하는 기본 바탕이었다. 이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명확한 설명은 근 150년이 흐르고서야 등장했는데, 바로 체내의 전하가 화학적 원리에 기반한다는 사실이었다. 신경은 전기화학적으로 신호를 전달했던 것이다.

    새로운 통찰은 볼타가 동물들이 내재적으로 전기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를 집중적으로 탐구해보기로 마음먹으면서 이루어낸 대다한 혁명적인 발견 덕분에 생겨났다. 바로 전기가오리의 전기충격에 관한 연구였다. 1799년 가을, 영국의 화학자이자 발명가였던 윌리엄 니콜슨(William Nicholson)이 제안한 개념들에 다라 볼타는 전기가오리의 전기 기관이 가지고 있는 반복적인 구조가 발전 능력의 원천인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가설을 실험하기 위해 볼타는 전기가오리의 해부학적 구조를 본떠, 희석한 산성 물질에 적신 판지 조각들과 함게 아연판과 구리판들을 번갈아 배치한 인공 전기 기관을 만들어냈다. 이는 원판 더미를 쌓아올렸다는 의미에서 파일(Pile)이라과 불렀는데, 해당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프랑스어와는 달리 영어로는 현재 '배터리'(하나 예외가 있다면 '원자로 파일'인데, 핵반응로에서는 여전히 파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원자로 배터리'는 아무래도 어감이 어색하다.)라고 부른다.

    놀랍게도 이 기기는 내부 부품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흐르는 전류인 직류를 생성했다. 갈바니와 볼타의 논쟁이 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중대한 발견은 1800년 3월 그가 영국왕립학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같은 해 6월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그렇게 화학적 전기의 시대가 열렸으며, 곧 전 유럽의 물리학자와 하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에서 배터리를 사용하여 새로운 형태의 힘을 실연하였으며 대중들을 매료시켰다.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의 그 유명한 런던에서의 강연처럼 말이다. 1812년에는 어느 십 대 소녀도 데이비의 극적인 전기 실연 중 하나에 참석한 듯하다. 그녀의 이름은 메리 고드윈(Mary Godwin) 이었는데, 사람들에게는 결혼한 뒤의 이름인 메리 셸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인체로 옮겨온 전기자극 실험

 

   전 유럽에서 행해졌던 알디니의 실험은 산전수전을 다 겪고 무감각해질 대로 무감각해진 의료계 종사들조차도 경악시켰는데, 라이든병의 일회성 전기충격이 야기한 짧은 경련과는 완전히 다르게 배터리에서 흘러나오는 직류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움직임처럼 괴이하고 조직화된 행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는 전기가 단순한 자극원이 아니라 실제 복합적인 행동의 신경적 근원이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알디니는 프랑켄슈타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와 달리 이제 제법 근접한 사람들도 있었다. 독일의 의사 카를 아우구스트 바인홀토(Karl August Weinhold)는 두 가지 종류의 금속을 통해 발생시킨 전기가 실제로 생명을 되살릴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메리 셸리의 걸작에나 나올 법한 터무니없는 실험들을 진행했다. 

    그토록 극적이면서도 의심스러운 근거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 오히려 그러한 실험 결과들 덕분에 뇌가 기능하는 데 있어서 전기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개념이 보편화되었다.  독일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였던 요한 리터 (Johan Ritter)가 동물혼과 갈바니가 관찰했던 동물 전기가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내린 결론에 수많은 사상가들이 동의했다. 

    신경과 뇌과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관한 이 같은 발견들의 중요성은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1827년판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유의어 사전 《로제스 시소러스(Roget's Thesaurus)》를 저술한 의사 피터 마크 로제 (Peter Mark Roget)는 신경의 기능이 "자연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떠한 현상보다도 전선을 타고 흐르는 전기적 힘의 전달 방식과 닮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보통 사람들이 뇌와 마음 그리고 전기 사에게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강력한 근거는 아마도 폭넓은 독자층을 가랑하던 19세기 중반의 대중과학 서적 《창조의 자연사적 흔적 (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에 그러한 정보가 등장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1844년에 익명으로 출간된 이 책은 스코틀랜드의 작가 겸 지질학자였던 로버트 챔버스(Roboter Chambers) 가 쓴 것으로,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새끼고양이 실험에 대한 바인홀트의 엉터리 묘사를 인용하하기는 했지만 어쨋든 뇌에 관해 다루는 절에서는 "뇌와 갈바니의 배터리 사이의 절대적인 동일성" 을 똑똑히 강조했다. 챔버스는 뇌가 하나의 배터리라면 생각이란 일개 전기의 작용일 뿐이며, "만약 정신작용이 전기적인 것"이라면 그 속도를 측정하는 일도 가능하리라고 주장했다.

 

신경의 활동 속도를 측정하다

 

   1833년에 이탈리아 생리학자 마테우치는 전류의 세기와 방행을 측정하는 검류계를 이용해 근육의 수축을 연구하던 중 근수축이 언제나 전류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도 지나지 않아 복합적인 실험 결과를 마주한 마테우치는 입장을 뒤집어 전기가 수축의 원인이 아니며 근수축은 신경성 힘이라고 불리는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840년대 말에 이르자 새롭게 드러난 실험적 증거로 인해 그는 이제 "이러한 수축의 원인은 명백히 전기적인 현상에 있다."고 다시금 견해를 수정해야 했다. 

    독일 베를린대학교의 요하네스 뮐러(Johannes Muller)는 신경 활동의 본질과 마음 및 지각 간의 연관성에 특히 관심이 많았는데, 이십 대 중반에는 특정한 유형의 신경을 자극하면(예컨데 안구를 압박함으로써 망막에 있는 신경에 자극을 가하면) 자극의 물리적인 속성(이 경우에는 압력)이 아닌 해당 신경이 평소 주고받는 감각의 형태(시각)로 지각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뮐러는 이를 '특수 신경 에너지의 법칙'이라고 칭하며 각각의 말초신경이 이와 연결된 감각기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특정한 유형의 에너지를 전달한다고 여겼다.

    뮐러가 이러한 입장을 취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신경이 전기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유기체들이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생기(vital principle)'를 품고 있으며 그것이 마음이 기능하고 행동을 만들어내는 데 관여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생기론적 관점은 낭만주의 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초반 유럽에서 보편적인 사상이었으며,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에 기여한 여러 맥락적 요소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뮐러의 눈에는 유기체 안에 전기가 존재한다는 모든 이야기가 그저 비유적인 것으로 비쳤다.

    뮐러로 인해 물리학의 방법론과 관점을 생리학 연구에 적용하려는 의욕이 고취된 이들은 스승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힘쓰는 학계의 오랜 전통에 편승했다. 뮐러의 생기론을 부정하고 일관되게 유물론적 접근을 지지했던 것이다. 뒤부아 레몽과 에른스트 브뤼케는 1842년에 자신들이 쓴 성명서에서 표현했듯 "유기체 내부에는 물리학과 화학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힘 외의 다른 힘은 운용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1840년대 말에 이르러 뒤부아 레몽은 신경이 기능하는 방식에 신비롭다고 할 만한 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정말로 전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활동전류라고 칭했던 전기의 흐름이 신경을 타고 흐른다는 사실과 더불어 조직들이 분극화되어 음전하를 띤 입자와 양전하를 띤 입자 모두가 각기 다른 비율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활동전류의 핵심이 되는 특성은 극성의 변화로 인해 전류의 흐름이 발생하는 음성 변동 (negative variation)이었다.

    뮐러의 또 다른 제자였던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뮐러가 측정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신경충동(자극에 따른 반응)의 속도를 연구했다. 1849년에 헬름홀츠는 개구리 다리 한쪽 끝에 회로 차단기를 부착한 기구를 고안해냈다. 근육이 수축하면서 회로가 차단되어 검류계에 표시된 측정값의 변화를 통해 자극이 주어지고부터 회로가 차단될 때까지 경과한 시간을 알 수 있겠끔 설계ㅈ된 장치였다. 덕분에 신경의 길이에 기초한 간단한 산수만으로 전달 속도를 계산해내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렇게 측정된 속도는 놀라울 만큼 느렸다. 무려 소리의 전달 속도 보다는 느렸으며, 뮐러나 《창조의 자연사적 흔적》의 저자가 상상했던 빛의 속도에는 터무니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신경 내에 존재하는 전기가 어떤 형태였던 간에 전선을 타고 흐르는 전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그고는 전기충격을 가한 지점으로부터 뇌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감각신경의 활동 속도가 초당 약 30미터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결국 그는 인간의 운동 신경도 이와 유사한 속도로 반응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에 더해 헬름홀츠는 이렇게 신경을 타고 전달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으니, 바로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쓰고 있는 활동전위(세포가 활동할 때 일어나는 전압의 변화)다.

 

'배터리 이론'으로 탐구한 인간 마음의 원리

 

   1849년에 출간된 《전기생물학의 기초(Elements of Electro-Biology)》에서 스미는 뇌가 수십만 개의 아주 작은 배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각각이 특정 신체 부위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욕구는 단지 뇌 안의 전하가 발현된 결과일 뿐이었고, 욕구가 충족되고 전하가 방출되고 나면 배터리가 재충전되어 다시 욕구를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일정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아가 그는 자신의 이론을 마음의 본질에도 적용하여 관념과 의식이 뇌 안에 존재하는 배터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된 결과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스미는 근육에서 뻗어 나온 신경들과 이러저리 얽혀 상호작용하는 감각기관의 신경들이 뇌의 중앙 배터리에서 각각 어떻게 합쳐지는지 나타내는 복잡한 도식을 만들었다. 그는 이러한 구조가 "어떻게 둥지에 대한 개념이 새의 머릿속에 담겨 있는지, 이떻게 말벌이나 벌이 벌집이라는 개념을, 거미는 거미집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있으며, 이 같은 추정에 기대어 우리는 본능적인 행동의 원리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선천적으로 생겨난 융통성 없는 연결성이 바로 본능적인 행동들이 동물의 뇌에 표상되는 방식이었다. 인간은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해서 추가로 두 개의 신경 결합 층을 필요로 했는데, 이 결합 층에 의해 개개의 단순식(수학에서 하나의 연산자만을 포함하는 연산식)들이 결합된 결과 스미스가 일반 법칙이라고 칭하는 과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를 그는 "인간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배열된 수많은 전기적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했다. 뇌와 몸은 모두 당대의 가장 정교한 기계였던 전신망과 유사한 일반 원리에 따라 동일하게 작용한다고 여겨졌다.

    그는 자신이 제안한 가상의 장치에서 두 가지 구성 요소에만 집중했는데, 첫 번째는 자극이 주어지면 사전에 정해진 반응을 보이도록 설계된 관계형 기계(relational machine)로 수학적 계산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기계가 제공하는 표상은 생각의 자연적인 과정과 유사하며, 기계 또한 인간만큼 이 과정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관계형 기계를 묘사한 도면은 1875년에 공고되었는데, 부채처럼 생긴 복잡한 계층적 구조가 그려져 있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작동 방식에 대한 정보는 알 수 없었다. 두 번 째 구성요소는 심지어 이보다 더 불가사의한 것으로, 차분형 기계(differential machine) 라고 불렀다. 이는 각기 다른 크기의 핀들로 구성된 시스템을 통해 '판단의 법칙을 예증'하는 장치였는데, 스미가 여러 가지 사실 또는 원칙들을 입력값으로 제시하면 그 사이의 연관성 유무에 대해 기계가 네 가지 반응 (그렇다/아마도/어쩌면/아니다) 중 하나를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스미는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가득찬 말들로 논의를 마무리 지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인간의 사고를 모사하는 기계를 개발하려는 현대적인 시도의 선구자 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계형 및 차분형 기계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어떠한 사실들 간의 관계성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마음이 찾아낼 수 있었던 모든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사고의 자연적인 과정을 모사하는 절차를 통해 그 어떤 유한한 수의 전제에서도 정확한 답을 구할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스미의 글이 해석기관 (Aanlytical Engine)(1820년대) 부터 차분기관(Difference Engine)(1830년대 이래 계속) 에 이르기까지 기계식 계산기를 개발하려 했던 찰스 베비지(Chalres Babbage)의 초창기 연구물들을 인용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스미가 제안한 가설의 중대한 한계점은 그가 뇌 기능에 대한 자신의 초기 개념이 전적으로 전기에 기반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오토마타와 같은 수압식 장치로도 가설이 완전히 동일하게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전신과 광전지에 빗대어 신경계의 작용을 설명했지만 그러한 비유는 사실상 그가 모형을 개발하는 데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며 뇌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도 아무런 통찰을 주지 못했다. 아울러 정작 그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기계를 설계할 때는 배터리와 전기라는 용어가 경첩과 금속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스미가 뇌와 사고의 표상이라고 주장했던 그의 기계장치는 정말 순수한 기계에 불과했다.

    비록 뇌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는 물론 컴퓨팅의 역사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소수의 역사학자를 제외하고 스미를 기억하는 이가 없지만, 인간의 사고를 기계적 활동으로 표상하려고 했던 그의 야심만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뇌와 마음, 전기적 활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뇌가 사유하는 물질이라면 기계 또한 사유할 수 있거나 적어도 뇌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했다. 스미의 접근법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데, 단지 당시의 기술이 형편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뇌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던 수십만개의 배터리 중 일부가 특정한 기능을 지니고 있거나 특정한 구조를 수반할 가능성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미의 개념에서 뇌 기능의 국재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뇌의 구조가 기능 그리고 인간의 성격과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이 대중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4. 기능 - 19세기

 

   초창기에 '두개 진찰'이라고 불렸던 골상학은 오스트리아 빈의 의사였던 프란츠 갈 (Franz Gall) 이 고안한 기법이었다. 1790년대에 갈은 인간의 행동과 성격이 뇌의 각기 다른 특정 기관에서 비롯되는 몇 가지 정신 능력들로 나뉠 수 있으며 두개골의 모양을 만져봄으로써 이 기관들의 상대적인 크기를 감지하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발상을 했다. 그리고 1800년대에 이르러 갈은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여준 열여덟 살 연하의 의하 요한 슈푸르츠하임(Johann Spurheim)을 만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 년간 그 둘은 유럽을 순회하며, '국왕, 각료, 지식인, 관리 그리고 온갖 유형의 예술가들'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알렸다. 보수 집단은 그들의 생각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때로는 대놓고 반대 의사를 표하기도 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카톨릭교회 모두 그 들의 이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갈의 이론이 완전히 엉터리였음에도 의미가 있는 이유는 뇌와 마음과 행동의 연결고리를 이해하는 데 기본 틀이 되는 세 가지 깨달음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이다. 첫째로 갈은 "뇌는 모든 감감 및 수의운동을 관장하는 기관이다"라고 말하며 뇌에 주안점을 두었다. 둘째, 갈은 뇌의 여러 영역이 사고와 행동의 각기 다른 측면을 담당하는 등 기능이 국재화되어 있다고 여겼다. 마지막으로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심리적인 능력과 그 밑바탕이 되는 기관이 어떻게 동물에게도 존재하는지 설명했다.

  

뇌 기능은 국재화되어 있는가

 

   학계에서 골상학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닌 과학적 사고의 최종 결정권자, 증거 때문이다. 제아무리 아름답고, 논리적이고, 매력적인 유행하는 이론이라 해도 실험적 근거가 없다면 결국은 버려질 수밖에 없다.  골상학의 경우에는 프랑스 의사 마리 장 피에르 플루랑스(Marie-Jean-Pierre Flourens)가 진행한 일련의 연구들에 의해 강력한 실험적 반증이 제시되었다. 

    플루랑스는 다양한 동물들을 대상으로 뇌의 각기 다른 영역을 제거하는 수술을 한 뒤 그에 따른 동물의 행동 양상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20년에 걸쳐 풀루랑스는 질릴 만큼 다양한 종류의 새와 파충류, 양서류에 더해 몇몇 포유동물까지 대상으로 삼아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실험을 통해 밝혀낸 가장 명확한 사실 중 하나는 모든 척추동물의 뇌 바로 아래, 척수의 최상단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연수라는 구조물에 관한 것이었다. 풀루랑스는 이 구조물이 손상되면 호흡과 심박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는 연수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작용을 관장하는 핵심 중추라는 것을 의미하는 듯했다. 또한 그 바로 위의 구조물, 뇌 후측의 가장 아랫단에 위치한 소뇌를 손상시키자 실험동물이 신체 기관들 간의 협응이 깨진 행동을 보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가령 소뇌가 손상된 비둘기는 마치 만취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한편 뇌의 가장 바깥층인 대뇌엽은 이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였다. 대뇌업이 제거된 동물은 자극에 전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실험 대상이 되었던 개구리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4개월을 더 살 수 있었지만 "완전히 멍청한 상태로 (....) 듣지도, 보지도 못하며 더 이상 자유의지나 지능을 갖추고 있다는 어떠한 징후도 비치지 않았다." 이에 플루랑스는 절제술이 인간을 비롯한 "다양한 종의 동물이 저마다 고유의 행동을 할 수 있게 했던 온갖 특수 지능은 물론, 총체적인 지각 능력 및 일반 지능의 상실"을 야기했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마음 그리고 지각과 관련된 고등 행동 기능 중 상당수가 갈이 주장처럼 고도로 국재화되어 있는 대신 피질 전체에 넓게 분포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국재화는 일부 기본적인 기능이나 운동 협응에만 적용되었다. 이를테면 뇌줄증 사례를 통해 뇌의 우측에 손상을 입은 환자가 좌측의 신체 일부 또는 좌반신 전체에 마비를 겪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갈은 뇌의 각 부위가 저마다 고유한 정신활동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며, 이를 고유 활동 (action proper) 이라고 일컬었다. 반면 플루랑스는 뇌의 활동 대부분이 뇌 전체가 공동으로 작용하여 '각각이 전체에, 전체가 각각에' 영향을 미치는 공통 활동(action commune) 이라고 보앗다. 그는 특정한 생리적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들도 일부 존재하나 뇌 전체로서는 "단일한 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의 발견

 

   1861년 2월, 파리 인류학 협회가 뇌의 크기와 정신 능력에 관한 토론회를 주최했다. 프랑스의 외과 의사였던 폴 브로카(Paul Broca)는 남성과 여성 몇 인종 간에 존재하리라 추정되는 차이를 지적하며 뇌의 크기와 지능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브로카의 이 같은 관점은 1839년에 두개계측법을 활용해 다양한 인종 집단들의 두개 용량을 알아낸 뒤 이를 사람들이 믿고 있던 인종 간 지능의 차이와 관련 지었던 미욱인 의사 새뮤얼 모턴(Samuel Morton)의 발상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때 논쟁에서 브로카에 반대했던 이가 바로 프랑스의 동물학자 루이 피에르 그라티올레(Louis-Pierre Gratiolet)다. 그는 비교해부학을 이용해 겉을 감싸고 있는 뼈를 따라 뇌를 네 개의 엽으로 나누고 전두업, 두정엽, 측두엽, 후두엽 등 오늘날까지 쓰이는 명명법을 창안했으며, 같은 종의 개체들 간에는 뇌의 주름들이 모두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더불어 그라티올레는 마음과 뇌는 기능의 국재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존재이고 두개 용량과 지능은 단순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라티올레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부이요의 사위였던 의사 에르네스트 오뷔르텡(Ernest Auburtin)은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파리의 어느 환자의 살례를 들어 충격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이 불쌍한 남자의 전두엽은 총상 탓에 완전히 겉으로 드러났고, 그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오뷔르텡은 1700년 전의 갈레노스의 돼지 연구를 연상시키는 소름기치는 실험을 진행했다.

      

      환자가 말을 하는 동안 커다란 스패츌러의 편평한 끝을 전두엽에 대고 부드럽게 누르자 그 즉시 말이 멈추고 입 밖으로 막 나오려던 단어가 차단되었다. 말하기 능력은 압박이 사라지자마자 다시 회복되었다. 이 환자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가한 압박은 뇌의 일반 기능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으며, 전두엽에 국한되어 사라진 유일한 기능은 언어 능력이었다. 

   

    이는 부이요가 옳았으며 뇌의 전측 부위가 실제로 말하기 능력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나지 않아 우연한 계기로 브로카에게 이러한 발상을 시험해볼 기회가 찾아왔다. 1861년 4월에 열린 파리 인류학 협회의 학술 모임에서 브로카는 참석한 동료들에게 최근 사망할 때까지 21년간 말을 전혀 하지 못했던 51세 남성의 뇌를 공개했다. 그가 유일하게 낼 수 있던 소리는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탄, 탄" 뿐이었다. 결국 이 환자는 20년 넘게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본명이 루이 브로뉴(Louis Leborgne)였던 탄은 평생 뇌전증을 앓기는 했지만 서른 살에 갑자기 말하는 능력을 상실할 때까지는 구두장이로서 정상적인 직업 생황을 영위할 수 있었다.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만 해도 건강하고 지적 능력을 갖춘 환자로 분류되었으나 점차 우반신이 마비되고 시력을 잃어갔다. 1861년 4월 12일, 르보르뉴는 중증의 괴저 증세로 브로카가 있던 외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때 브로카가 그를 처음 만났다. 말하거나 글을 쓰지는 못했지만 르브로뉴는 시계를 볼 줄 알았으며, 손가락을 튕겨 수를 나타낼 수도 있었다. 브로카는 그가 언어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 훨씬 지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닷해 후 불쌍한 르보르뉴는 죽고 말았다. 부검 결과 그의 뇌에서는 연이은 병변들이 발견되었는데, 주로 좌측 전두엽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에 브로카는 "이 환자의 경우 전두엽의 병변이 말하기 능력의 상실을 야기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했다."고 결론 내렸다.

     브로카는 곧 르보르뉴의 사례를 말하기 능력이 전두엽에 국재화되어 있다는 부이요의 발상과 연결시켜 자신의 관점을 보다 상세히 설명하는 글을 펴냈다. 또한 르보르뉴에게서 관찰된 점진적인 기능 상실과 병변 확산 사이의 연관성을 도출하며 해부학적으로 그의 뇌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일부 기능들이 국재화되어 있다는 주장을 공고히 하였다.

    브로카가 발견한 현상이 내포하고 있던 복잡한 특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젊은 의사 카를 베르니케 (Carl Wernicke) 에 의해서도 드러났다. 1874년, 베르니케는 다소 분명치않게나마 말을 할 수는 있었지만 언어를 일정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 환자의 사례를 보고했다. "이 환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말을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 바탕으로 베르니케는 브로카가 밝혀낸 전두엽의 특정 영역에 언어 기능 전부가 위치해 있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말하기 능력이 브로카 영역에서 비롯되는 반면, 브로카 영역보다 뒷편, 현재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으로 불리는 곳으 비롯한 뇌의 다른 영역들이 언어의 이해에 관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말하기 기능의 다른 하위 요소가 뇌의 다른 영역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 아니었다. 베르니케가 주장했던 것은 언어 이해라는 능력 전체가 고도로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하기 능력이 국재화되어 있다는 것은 더욱 명백한 근거를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이유는 그보다 한 해 앞서 프랑스 브레스트 외과 의사였던 앙쥬 뒤발(Ange Duval) 교수가 밝힌 바 있다. 뒤발은 말하기 능력이 좌반구에 국재화되어 있음을 뒷받침하는 여러 사례들을 나열한 후 다음과 같이 모든 이들이 마주하고 있던 방법론적인 문제를 강조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간접적인 증가를 제공하기에 충분히 많은 양의 자료이지만 생리학계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은 마땅히 동물실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입증하기를 선호한다. 그러나 동물들이 보유하고 있지 않은 기능을 연구하는 데 동물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인간을 생체 해부해서 인위적으로 병변을 만들지 않는 한 우리는 그와 유사한 병변이 우연히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5. 진화 - 19세기

 

   1840년에 다윈은 자신이 소장한 뮐러의 《생리학의 기초(Elements of Physiology)》에 "유전적으로 형성된 뇌의 구조가 본능을 야기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구조는 적응적으로 형성된 다른 모든 구조물과 마찬가지로 혼경에 다라 개량될 여지가 있다"는 글귀를 써넣었다. 다윈은 만약 뇌가 생각을 만들어낸다면 뇌의 구조와 그로부터 비롯된 생각의 유형 사이에 분명 연관성이 존재할 거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는데, 이는 곧 자연선택이 뇌의 구조를 변형시킴으로써 마음과 행동 양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했다. 본능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원론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까지 설명할 수 있는 접근법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뇌와 뇌에서 비롯된 행동은 여느 기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로 다윈은 필기장에 생각이란 "뇌의 분비물"로서 "간의 담즙과 같은 기능"이라고 쓰기도 했다.

    1860년, 독일의 생리학자 구스타프 페히너(Gustav Fechner)는 뇌 과학의 역사상 가장 과감하고 놀라운 예측을 하나 해냈다. 마음의 단일성이 뇌의 구조적 완전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는 곧 뇌의 두 반구를 연결해주는 뇌량이라는 구조물을 절개해 두 개로 분리하다면,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마음을 가지게 되리라는 점을 시사했다. 페히너는 처음에는 그 두 개의 마음이 동일할 터이지만 새로운 경험들이 쌓이면서 점차 제각기 다르게 변하게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극적인 가설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은 그 뒤로도 한 세기가 더 지나 미국에서 정신외과를 도입하면서부터였다. 

 

마음은 자연선택의 결과다

 

   다윈은 각기 다른 종의 동물의 뇌가 어째서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는지 설명해줄 원리를 밝혀냈는데, 바로 다른 행동을 하기 위해 진화했기 때문이다.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행동 패턴과 더불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뇌의 복잡한 구조의 기원은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 작용 원리가 불가사의한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다윈은 의식이 일종의 동물의 머나먼 조상으로부터부터 온갖 갈래에 걸쳐 깊숙이 뻗어 있으며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강네는 오직 의식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이는 곧 우리가 다른 유인원들이 가지지 못한 완전히 새롭고 어떤 특별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특정일 갖춘 것이 아니라 그저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조금 더 의식이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의식을 가진 기계인가

 

   헉슬리는 '의식이 있는 오토마타'라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해 데카라트의 관점을 상세하게 재검토해 개구리가 헤엄치거나 도약하는 동작을 비롯하여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상다이 복잡한 행동들이 뇌의 관여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반사작용임을 증명하는 최신 과학 연구 결과들과 비교했다 데카르트는 동물들이 그저 무감각한 기계라고 생각한 듯하지만 헉슬리는 이를 가장 뜻밖의 가설이라고 여겼다. 그는 대신 다윈의 접근법을 따라 동물과 인간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이고자 했다.

   

     인간에게서 의식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볼 근거가 충분한 뇌의 부위를 하등동물들도 미숙하게나마 갖추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례들에서는 기능의 수준과 체내 기관의 크기가 비례하므로 뇌 또한 그러하다고 결론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짐승들이 우리 수준의 의식을 갖춘 것은 아닐지라도, 또 언어가 부재한 탓에 생각의 흐름이 아닌 감정의 흐름만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이들 역시 우리 자신의 의식과 유사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다.

    

    헉슬리는 이러한 통탈을 인간에게 적용해 "우리의 심적 상태는 단순히 유기체 내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변화에 대한 의식의 표상이며, 극단적인 예를 들자만 우리가 자유의지라고 칭하는 느낌이 자발적 행동을 낳는 것이 아니라 뇌가 그러한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표상이 바로 그 같은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독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바와 크게 대치되는 발상이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헉슬리는의 주장은 자유의지, 즉 인간이 여러 가지 대안들을 고려하고 그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능력 자체가 모두 환사에 지나지 않음을 시사했다. 

 

6. 억제 - 19세기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일부 신경의 경우에는 핵심이 되는 속성이 바로 반응이 일어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기능이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베버 형제는 자신들이 발견한 바를 마음이 때때로 신체의 움직임이나 반응을 막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결부시켰고, "지나치게 격렬하지 않은 경련이라면 의지로 제한이 가능하며, 많은 반사운동의 발단도 억제할 수 있다는 경험 (...) 또한 뇌가 신체의 움직임에 대해 억제 작용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후 다른 말초신경들에 대한 연구 결과에서도 잇달아 기본적인 생리 과정을 억제하는 효과가 발견되었고, 1863년에는 러시아의 생리학자 이반 세체노프(Ivan Sechenov) 가 이러한 통찰을 일반화하여 뇌 기능에 관한 이론을 발표했다.  세체노프는 베버 형제와 폴크만의 견해를 기반으로 이전에 뒤부아 레몽, 헬름홀츠, 클로드 베르나드(Claude Bernard)와 같은 유럽의 위대한 생리학자들과 함께 일했던 경험을 더해 뇌가 두 개의 상보적 중추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는 움직임을 억누르는 반면 다른 하나는 움직임을 증대시킨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인간은 서로 연합된 반사작용을 빈번하게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움직임 각각을 유형별로 덩어리 짓는 법을 학습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마찬가지로 반사작용을 통해) 그러한 행동들을 억제하는 능력을 습득한다"는 해석은 대부분의 행동 양상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듯했다.

    이러한 발상에 힘입어 세체노프는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반사 경로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극 → 중추적 억제 또는 증대  → 근육의 반응

 

   그의 말에 따르면 "생각이 정신적인 반사작용의 세 단계 중 처음 두 단계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 생각은 이를 유바란 외부 자극 및 그에 대한 적절한 중추 활동에 해당하며, 그렇게 발생한 생각이 작용하여 반사의 마지막 단계인 근육 반응까지 촉발하는지 여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며 세체노프는 생각이 '반사작용의 첫 두 단계'로 느껴지기보다는 수의적 활동으로 충만하며 일반적으로 외부 요인과는 독립된 내부 과정에 가깝다는 당연한 비판에 관해서도 다루었다. 

    세체노프는 생각의 본질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하고 반사작용의 반복적인 억제와 활성화가 어떻게 복잡한 행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이고자 했다. 헨리 모즐리가 1867년에 "뇌의 가장 필수적인 기능 중 하나는 그 아래 위치한 신경중추를 억제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관심에도 불구하고 억제가 실제로 작용하는 원리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들이 제기되었고, 모두 일종의 물리적인 비유에 기대고 있었다. 

    다른 사상가들은 훨신 더 복잡한 수압식 비유를 차용하여 억제가 두개의 파도가 만나듯 신경계 내의 두 부위의 활동이 서로 간섭을 일으켜 서로의 활동을 상쇄하거나 변형시킬 때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몸과 마음을 통제하는 뇌

 

   한편 과학자들은 억제의 부재를 통해 뇌의 작용 원리에 관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 탐구하기 시작했다. 1865년, 영국의 젊은 의사 프랜시스 앤스티 (Francis Anstie)는 진정제와 마취제가 "뇌에 매우 독특한 유형의 부분 마비"를 초래하며, 대마와 알코올의 경우 "특정한 능력이 고양되는 현상은 해당 기능 자체에 정적자극이 가해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통제하는 힘이 제거된 탓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내놓앗다. 뇌가 본래 억제 등의 방법을 통해 신체를 제어하던 능력을 향정신성 약물들이 억누르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통제가 뇌 기능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지만 당시만 해도 뇌가 어떤 일을 하는지 연구할 때 통제라는 개념을 활용하지 않았다. 앤스티의 견해는 뇌의 전반적인 기능 중의 하나가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며 억제와 통제의 개념이 서로 단단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아 가는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적인 통찰 덕분에 건강한 상태 및 질병에 걸린 상태에서 뇌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방식이 가능해졌다.

    로이드 모건은 이러한 관점을 확장시켜 인간과 같은 고등 유기체의 경우 통제 능력이 행동의 유연성 증진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세체노프의 발상과 유사하게 통제와 의식을 연결 지었다. 

    모건은 인간이 의식을 갖춘 오토마타라고 주장했던 헉슬리의 모순적인 견해를 멀리하고 의식의 역할은 통제라는 한결 세련된 진화론적 관점을 취하며, 의식이 단순 반사작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유기체에게서만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다양한 범주의 장애들이 통제의 상실에 의해 나타나는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는데, 몽유병, 정신이상, 히스테리적인 성적 충동 (당연히 여성에게만 해당되었다.)은 물론 천식까지도 그 대상이었다. 1870년대와 1880년 뇌가 몸과 마음을 통제하는 방식을 이해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장소 중 하나는 신경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Jean-Martin Charcot)가 근무하던 파리의 세페트리에르 병원이었다. 샤르코와 동료들은 다발성경화증, 파킨슨병, 운동신경 질환, 투렛 증후군을 포함하여 주요 행동 증상들을 동반한 여러 장애들이 모두 뇌의 억제 및 통제 능력이 손상을 입은 데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후 프로이트와 러시아의 심리학자 이반 파블로프(Ivan Pavlov)도 행동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억제 개념을 차용했지만 둘 다 뇌에는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더욱이 프로이트는 과학적 근거가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큰 영향력을 떨친 정신분석학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 착수하고서부터 점차 심리학의 유물론적 근거에 흥미를 잃었다. 프로이트는 뇌의 기능으로는 심리학을 설명할 수 없다고 믿었다. 1915년에 그는 "정신활동이 다른 어떤 기관들의 기능도 아닌 뇌의 기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있음을 인식했지만 자신의 심리학 이론은 "정신 기제의 영역들과 관련되어 잇는 것이지 신체내 이들의 해부학적 위치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고집했다. 또한 1916년에는 "불안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신경의 흥분이 전달되는 경로에 대한 지식만큼 흥미를 끌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명시했다. 

   헬름홀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지각할 때, 신경계가 현재 지각하는 대상의 본질에 관한 "무의식적 결론"을 이끌어낸다고 주장했다 그가 단언한 바에 의하면 지각은 단순히 환경에서 비롯된 인상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귀납적 추론의 결과"였다. 헬름홀츠의 설명은 신경계에 마음의 자각 없이도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어떤 과정이 존재함을 시사했다. 그리고 그는 이 과정이 충분한 반복을 거쳐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는 지각하는 법을 학습한다.

   헬름홀츠가 묘사한 무의식적 판단의 또 다른 예는 우리가 양 눈을 통해 들어오는 서로 미세하게 차이 나는 상(눈을 한쪽식 번갈아 떳다 감았다 해보면 두 개의 상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들로부터 세상에 대한 삼차원의 입체적인 조망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의 동료 빌헬름 분트가 밝힌 것처럼 뇌의 시각계 어딘가에서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이 두 개의 상이 한데 모여 하나의 일관된 상을 형성함으로써 깊이를 지각할 수 있게 하는 듯했다. 다시 말해 삼차원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인상은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동안 두 개의 이차원 상이 결합하여 구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각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더욱 극적으로 도전하는 과정에서 헬름홀츠는 지각에 일종의 필터가 개입되어 있어 뇌가 주어진 모든 자극에 동등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우선 우리의 몸은 환경에 반응하며 보통 그에 다라 지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이를테면 어둠 속에서 동공을 확장시키는 등의 반응을 통해 지각에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헬름홀츠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단순히 우리에게 던져지는 인상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하는데, 그러한 인상들을 훨씬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도록 상황에 맞게 조직들을 조정한다."

    더욱 골치 아픈 문제는 우리의 시야에 사실상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맹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망막에서 시신경이 안구 외부로 뻗어나가는 지점에는 광수용기(빛 자극을 신경 신호로 전환하는 기관)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른쪽과 왼쪽 눈의 시야의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과 왼쪽 지점에 해당하나.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바라본ㄴ 세상에서 어떤 간극도 지각하지 못하며, 굳이 여기에 집중하지 않는 한 맹점이 존재하는 사실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눈이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움직여서 시야의 비어 있는 부분을 끊임없이 메우기 때문이다. 

    우리가 맹점을 눈치재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자 헬름홀츠가 특히 큰 흥미를 느꼈던 현상은 뇌가 자극을 처리하는 방식의 일반적인 원칙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는 외부 사물들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감각의 모든 부분을 무시해버리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뇌는 존재하지 않는 자극은 단순히 무시하고 주변의 형체와 색에 기초하여 지각적으로 흐릿한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사이를 메우며, 우리는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여기서 시사하는 바는 뇌의 복잡한 구조물들이 의식적인 사고의 관여 없이 그러한 의식적인 사고의 선행 조건으로 명백히 작용하는 논리 연산들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1787년에 출간된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우리가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결정한느 일부 특성들은 선험적, 즉 경험하지 않고도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칸트의 주된 관심사는 공간이나 시간, 도덕적 판단과 같은 것들이었지만 그는 우리가 환경과 상호작용할 때 벌어지는 일의 핵심적인 특성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우리의 감각은 단순히 모든 자극을 뇌로 들여보내는, 활짝 열린 상태의 밸브가 아니다. 우리는 주변 환경의 특정한 부분만을 지각한다. 소사한 예로 곤충이나 조류 등 다른 동물들은 볼수 있는 자외선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리의 뇌에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필터 또한 존재한다. 

   헬름홀츠는 뇌가 단순히 주어진 인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변화시키고 해석하여 무의식적인 추론을 한다고 여겼다. 

 

신경계 구성 요소에 관한 가설들 

 

   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으므로 많은 생리학자가 신경계의 기본 성분들에 집중함으로써 통제와 억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자 했다. '반사호' (반사에 관여하는 신경 회로)를 이루는 신경과 근육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여 반사 행동을 만들어내는지 알고 싶었던 리버풀대학교의 찰스 스콧 셰링턴(Charles Scott Sherrington) 도 이러한 접근방법을 취했다. 셰링턴은 반사호가 신경계의 기본단이이며 복잡한 행동들은 모두 여러 반사들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셰링턴은 이전에 발생했던 반사 활동의 작용으로 인해 반사 행동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역치가 낮아지기 때문에 하나의 반사에서  또 다른 반사로 빠르게 연쇄적인 전달이 이루어져 단일하게 협응된 복잡한 행동 반응이 가능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50년전 스테노가 그랬듯 셰링턴도 동물을 하나의 복합적인 기계로 바라보며 각각의 구성 요소를 살펴봄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셰링턴은 각가의 감각신경들이 어떻게 수용장이라고 불리는 피부의 특정한 부분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자극이 주어지면 신경이 반응하도록 만드는지 보여주었다. 이러한 신경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활성화되면 모두 동일한 긁는 행동, 즉, 셰링턴이 소파 반사호의 '최종 공통 경로'(final common path) 라고 칭했던 근육의 반응이 일어났다. 셰링턴은 뇌의 최상위 기능들에서야말로 억제의 중요성이 발휘된다고 확신하고 "신경 억제는 마음이 작용하는 데 큰 요인임에 틀림없다"고 여겼다.

    실제 신경 활동으로 옮겨 도식을 현실에 기반한 뇌 기능 모형으로 바꾸는 일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다. 19세기의 마지막 몇 십 년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발견의 중심에 전기자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전기는 그저 기능을 드러나게 만드는 조금 더 섬세하고 정밀한 형태의 자극으로만 여겨졌다. 막연하게 추정만 하던 것들이 명확해지고, 신경 활동을 제대로 이해하며, 뇌 활동의 기반을 통해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과학자들이 우선 실제 뇌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깨달아야 했다. 

 

7. 뉴런 -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 중 하나는 모든 유기체가 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포는 오직 다른 세포를 통해서만 생성될 수 있으므로 생명체의 자연발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힌 세포 이론의 수립이다. 생물을 이루는 기본입자를 찾아낸 것이다. 이러한 이론이 빠르게 받아들여진 데는 1830년에 체코의 해부학자 얀 푸르키네(Jan Purkyne) 가 최신식 현미경으로 인간 소뇌의 얇은 조각을 관찰하여 찾아낸 근거가 일조했다.

     푸르키네는 자신의 학생이었던 가브리엘 발렌틴(Gabriel Valentin) 과 함게 소뇌가 작은 점투성이의 화병처럼 생긴 소구체로 이루어졌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838년에는 요하네스 뮐러의 제자였던 로베르트 레마크(Robert Remak) 가 섬유들 각각이 소구체 중 하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뇌에는 세포가 존재했던 것이다.

    소구체 및 섬유들이 신경세포의 일부라는 사실과 더불어 뇌도 신체의 다른 모든 부분과 마찬가지로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그로부터 10년 이상이 더 지난 뒤 레마크의 업적이 아닌 스위스의 해부학자 알베르트 폰 쾰리커(Albert von Kolliker)의 <<인체 조직학 편람>>(Handbuch der Gewebelehre des Menschen) 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신경세포들은 총 세 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했다. 바로 원형질돌기(지금의 명칭은 가지돌기) 라고 일컬어지는 가지들, 세포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긴 튜브 형태의 섬유인 축색원통(축삭돌기) 이었다. 

    1873년에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카밀로 골지(Camillo Golgi) 는 다이크로뮴칼륨으로 경화시켜둔 조직편 이에 잘산은을 약간 흘리고 말아/다. 그러자 곤란하게도 두 화학물질이 반응하면서 조직이 검게 변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표본을 찬찬히 살피던 골지는 신경세포의 극히 일부만이 염색되었으며 오히려 검은 실루엣이 밝은 배경에 대비가 되면서 아주 세밀한 부분들까지 구벼ㅐㄹ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역설적이지만 아주 적은 세포들만이 염색되었다는 사실은 단일한 신경세포의 구조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일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했다.

     이후 몇 년간 골지는 이 까다로운 기법을 활용하여 척추동물의 소뇌, 후각 신경구, 해마, 척수 등을 탐구했다. 해당 기법은 처음에는 '검은 반응'(black reaction) 이라고 불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냥 '골지법'(Golgi method) 혹은 '골지 염색법'(Golgi stain)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골지가 바라본 현미경 아래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으니, 기존의 방법들로 밝혀낸 신경의 분기는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법을 통해 세포를 훨씬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웃한 두 신경세포의 서로 얽힌 가느다란 가지들이 정말 각각 독립된 구조인지까지는 알 수 업었다. 골지는 이 가지들이 실제로 분리되어 있다는 데는 납득했으나 신경세포들이 축색원통 수준에서는 서로 융합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신경그물설을 고수했다. 그는 뇌세포들 간이 기능적 차이에 상응하는 화학적 혹은 다른 차이가 존재할 가능성은 인정했지만 일단 신경세포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전부 가상이 연결망을 타고 공유된다고 확신했다. 골지는 누가 뭐라 하든 절대적으로 국재화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신경세포설의 등장 

 

   1880년대 중반, 독일 라이프치히대학교 소속의 빌헬름 히스 (Wilhelm His)는 신경세포들 간의 융합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보고하며 신경세포도 분명 다른 세포들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독립적인 구조물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한 히스는 신경세포이 복잡한 나무 같은 부분을 묘사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냈는데, 바로 그리스어로 나무를 뜻하는 단어 덴드론 (dendron) 에서 따온 덴드라이트(dendrite;가지돌기) 였다. 

    신경계 전체가 하나의 네트워크라는 가설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베살리우스만큼이나 과학계에 크게 기여한 스페인의 신경해부학자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Santiago Ramon y Cajal) 의 연구였다. 카할은 실력파 해부학자인 동시에 재능 있는 화가이자 사진작가로, 컬러 사진을 제작하는 자기만의 방식을 발명하기도 했다.

    카할의 관찰 연구는 뇌나 망막 등의 말초 감각기관들이 뚜렷하면서도 상당히 불가사의의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세포의 가지돌기들은 외부 환경을 향해 있었던 반면 축색원통은 뇌의 중심부 가까이에 있었다. 카할은 자신이 개량한 골지 염색법을 활용하여 신경세포들이 아주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유사한 형태의 세포들끼리 층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선 그는 골지가 주장했던 바와 달리 축색원통들이 서로 융합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이고는 가지돌기가 융합도 영양 동급도 하지 않는 대신 어떤 필수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당대 가장 복잡했던 기술인 전신기에 대한 비유를 활용하여 이를 설명했다. 카할은 소뇌에서 발견된 푸르키네의 세포들이 "마치 전신주가 전선을 지탱하듯" 과립세포라는 또 다른 유형의 세포와 연결되어 있으며, 세포의 가지돌기들이 주변 세포들과 "전파 전달을 위한 접촉"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카할은 후각 신경구의 구조를 보면 가지돌기가 어떻게 "신경섬유들로부터 전류"를 취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콧속에 자리한 이 감각세포들은 뇌에서 수렴되어 후각 사구체라는 둥근 덩어리들을 형성하는데, 다른 계열 세포의 가지돌기들이 이 덩어리들에 연결되고, 그 축색원통들이 뇌의 심부로 들어감으로써 중심부까지 전류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카할은 이만큼이나 정밀하지만 해부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구조를 찾아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카할과 폰 쾰리커 긜고 다른 학자들의 연구는 결국 1891년 독일인 해부학자 빌헬름 폰 발다이어 (Wilhelm von Waldeyer) 가 나중에 북극 탐험가로 유명해진 프라드쇼프 난센(Fridtjof Nansen)이라는 어느 노르뤠이 학생의 연구를 통해 신경세포들 간의 융합은 존재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고 보고하면서 개괄되었다. 이 모든 근거를 바탕으로 폰 발다이어는 신경세포들이 서로 분리된 개별적인 독립체라고 주장하며 뉴런 (neuron;그리스어로 섬유를 의미한다.)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경세포의 현대적인 해부학 용어를 정립하는데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발전은 1896년, 이제 여든 살이 된 폰 쾰리커가 축색원통을 지칭하는 용어로 축삭(axon)을 사욤하면서 이루어졌다. 이제야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았고, 이러한 견해는 곧 신경세포절로 알려지며 빠르게 수용되어 향후 신경계에 관한 모든 연구의 근간이 되었다. 

 

뇌 기능 이해를 위한 구조적 틀 

 

   1894년 2월, 카할은 런던왕립학회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강연을 했다. 그는 지난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발표되었던 뇌 구조에 관한 현미경 연구들을 개괄하며 그 자신이 특별히 기여한 부분들을 짚어가며 뇌의 작용 방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을 탐구했다. 우선은 포유류의 뇌가 '자연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미묘하고 복잡한 기계'라는 일반적인 견해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전의 사상과들과는 달리 카할은 이 구조물의 기본단위들을 묘사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이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부분을 뒤덮고 있는 전신망의 구성 요소들과 유사하게 기능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신경 세포는 가지돌기와 세포체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류의 수용(reception) 기관과 길게 늘어진 축색원통(축색돌기) 로 대표되는 전달(transmission) 기관 그리고 신경종말가지 (terminal arborization) 로 대표되는 분배 (division or distribution) 기관을 갖추고 있다.

  

    뉴런의 각기 다른 부분에서 수행하는 세 가지 기능, 다시 말해 수용, 전달, 분배는 강연에서 제공한 도식에도 강조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카할이 1891년부터 효율적인 설명을 위해 쓰기 시작했던 핵심적인 요소가 담겨 있었다. 바로 '신경 전류와 세포 사이의 역학 관게의 예상 방향'을 나타내는 화살표였다. 카할은 이를 두고 뉴런의 동적 분극화 (dynamic poloarization) 라는 다소 투박한 표현을 사용했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신경은 물론 반사호를 형상하기 위해 신경이 지나가는 근육과 경로들의 총체적인 해부학 및 기능적 연구들로부터 도출된 결론들을 일반화하는 작업을 했다. 1890년 <<심리학의 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모든 경로들은 단방향 , 측 '감각' 세포에서 '운동' 세포로, 운동 세포에서 근육으로 향하며, 결코 역방향으로 작용하는 법이 없다. 예컨데 운동 세포는 직접 감각세포를 깨우지 못하며, 운동세포가 일으킨 신체의 움직임에 의해 유입되는 전류를 통해서만 발화된다. 또한 감각세포는 언제나 운동영역을 향해 발화하거나 일반적으로 그러한 경향성을 보인다. 이러한 방향을 '순방향'이라고 하자. 나는 이 같은 법칙을 가설이라고 칭하지만 사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실이다.

 

   제임스는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기 위해 당연한 유형의 세포 구조를 나타내는 그림 여저 장을 함께 제시했다. 세포들은 전부 서로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네트워크에 속해 있는 듯했으며, 카할이 1년 전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상의 신경 전류 방향을 표시하기 위해 화살표가 쓰였다. 

   신경계의 구조가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카할의 관점에서 전체 시스템의 작용 방식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지돌기가 복잡하게 가지를 뻗은 패턴은 감각 인사으이 강도에 따라 얼마든지 대안적인 경로를 취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카할은 약한 자극성 흥분은 바로 신경망을 타고 전달되는 반면 조금 더 강한 흥분은 인접한 세포들의 가지를 통해 전파되어 결과적으로 "가까운 대측 가지들의 전 시스템이 영향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카할은 경험이 "가지돌기와 부수적인 신경가지들의 시스템을 더욱 발달" 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효과는 기존의 연결을 강화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세포 간의 완전히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데"도 작용되었다. 카할에 주장에 따르면 학습은 세포 간의 연결성을 증가시킨다. 그는 벨기에의 과학자 장 드무어(Jean Demoor)가 대뇌 뉴런의 가소성이라고 칭했던 현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프랑스의 해부학자 마티아스 뒤발(Matthias duval)은 카할의 1894년 작 <<신경계 구조에 관한 새로운 관념>>(Les Nouvelles Idees sur la structure du systeme nerveux) 에 헌사한 서문에서 신경세포의 독립성은 신경계와 그 안에 담긴 기능들이 고정적이 아닌 가변적인 것임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신경 전류가 전달되는 과저에서 전도 및 연합을 위한 신경 경로들은 어쩌면 무한 개의 스위치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훈련을 함에 따라 학습한 기술에 걸맞게 일부 특정한 경로들을 통한 전달이 점차 두드러지게 되는 양상을 보이는 듯하다. 

  

    뒤발이 제안한 개념은 조직 구조가 일종의 스위치처럼 기능함으로서 해부학적으로 뻣뻣한 구조마저도 경험하는 바에 따라 신경충동별로 다른 경로를 선택하고 그 외의 불필요한 경로들은 스위치를 내려버리는 등 기능적으로 유연하게 반응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위치라는 단어가 30년 이상 줄곧 전기와 관련된 의미로 쓰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것이 내가 알기로 신경계 조직이 스위치를 수반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로부터 2년 뒤 플아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마음의 본질에 대해 이상주의적인 입장이었으며, 생각과 뇌 활동이 동일하다는 것이라는 발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뇌의 기능과 당대 가장 발전된 형태의 기술 사이의 잠재적 유사성에 관한 그의 통찰은 의외로 많은 것을 암시했다. 베르그송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뇌는 일종의 중앙 전화교환 시설에 불과하다. 뇌가 맡은 임무란 그저 소통을 허용하거나 지연시키는 것으로써 (...) 말초로부터 들어온 자극이 다는 사전에 규정된 바가 아닌 선택에 따라 이쪽 또는 저쪽의 운동 기제와 접촉할 수 있는 중심 시설을 마련해 준다. 

 

    기게에 의존한 비유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1899년에 카할은 과함하게 인간의 뇌 세포들이 이루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네트워크가 어떻게 자각이라는 능력을 만들어내는지 설명을 시도했다. 

     

     신경충동은 신경가지들 내의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는데, 이느 곧 다른 뉴런의 가지돌기에 물리화학적 자극으로 작용함으로써 이후 이어지는 뉴런에 새로운 전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의식 상태란 바로 신경 말단에서 비롯된 뉴런 내의 이러한 화학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대체로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사실 카할에게는 과학적인 설명이라기보다 일종의 신앙에 가까웠다. 정확한 기제도, 화학적 변화가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내는지 설명을 보조할 비유도 제안하지 못했던 것이다. 

 

뇌 속의 특별한 연결, 시냅스

 

   때로는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 이 경우에는 두 뉴런이 만나는 장소에 이름을 붙이면서 신경총동의 전달 방법을 이해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1897년, 셰링턴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생리학 교수였던 마이클 포스트(Michael Foster) 가 기획한 <<생리학 편람>>(Handbook of Physiology) 개정판의 한 부분을 맡아서 써달라는 청을 받았다. 여기에서 셰링턴은 두 세포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묘사하기 위한 새로운 용어를 소개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라 우리는 세포의 잔가지 끝이 다른 세포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영향을 받는 세포의 가지돌기나 세포체의 어떤 물질과 단순히 접촉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듯 신경세포 같의 특별한 연결을 시냅시스라고 부를 수 있다.

   

    '시냅시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움켜쥐다'(Clasp) 라는 뜻인데, 전류를 보내는 세포의 축삭 가지가 뒤에 이어지는 가지돌기를 꽉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자 당시 세포생물학에서 이미 쓰이고 있던 시냅시스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인 시냅스가 되었다. 

     셰링턴은 그저 이 신경해부학적 공간에 이름을 붙이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단순히 두 세포 사이에 존재하는 수동적인 틈이 아니라 이를 통해 세포에서 세포로 전달되는 신경충동의 성질에 실제로 변형을 가할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웠던 것이다. 

   

     각 시냅시스가 신경충동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기회를 제공하며, 축삭의 말단 가지에서 다른 세포의 가지돌기로 전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음 세포의 가지 돌기에서는 기존과 다른 성질을 띤 신경충동이 시작된다고 추측할 만한 것으로 사료된다. 

 

     셰링턴은 신경세포들이 "자체에서 생성된 흥분 상태 (신경충동)를 공간적으로 전달(전도) 하는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신경계가 이 신경충동들을 통합함으로써 적절한 행동을 낳게 된다고 보았다. 나아가 셰링턴은 시냅스를 "분기가 이루어지는 표면"으로 묘사하며 이러한 표면들에서 취하는 움직임이 신경충동이 이들을 가로질러 이동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한 비밀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축삭과 가지돌기의 표면이라는, 그때까지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미세한 공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셰링턴은 시냅스 양 끝에서 신경충동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보여주는 연구 데이터들을 살펴본 결과, 깔때기처럼 한 곳으로 모이는 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이는 시냅스가 마치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적용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각각의 시냅스에서는 전달 과정에서 자유로워진 소량의 에너지가 새로운 에너지의 축적을 일으키는 해제력으로 작용하는데, 이는 신경섬유에서처럼 순수하고 단순하게 일련의 균등한 전도성 물질을 따라서가ㅏ 아니라 높거나 낮거나 항상 어느 정도 수준으로 존재하는 장벽을 뛰어넘으로써 이루어진다. 

 

    바로 이 장벽이 시냅스로서, 셰링턴의 표현에 따르면 '일련의 전도체'로 이루어진 뉴런에 '저항'을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그에 따른 결과가 바로 셰링턴이 '반사회로에 밸브가 있는 상태'라고 칭한 상태였다. 반사가 반드시 한쪽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 말이다.

     셰링턴은 뉴런 간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표면에서 이렇듯 밸브처럼 작동하는 현상을 설명해줄 근거는 "어쩌면 시냅스의 막이 어느 한쪽으로 특히 높은 투과성을 보이는 데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당시 염분이 내장기관의 벽을 넘어 이동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와 유사한 사실이 막 발견되었다. 시냅스 기능의 비밀을 풀 열쇠는 신호를 주고받는 두 세포의 세포막 구조에 있는 듯했다. 그러나 상충된 관점을 내세우던 연구자들이 끈질기게 맞붙으면서 시냅스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기까지는 치열한 연구가 수십 년 더 지속되어어야 했으며, 이때의 다툼은 20세기 과학계에서 가장 길게 이어졌던 논쟁 중 하나로서 일명 '수프 파와 스파크 파의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1877년, 뒤부아 레몽은 신경 흥분이 어떻게 근수축을 유발하는지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두 가지 대안적인 설명을 내놓았는데, 이는 이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와 관련된 생각을 전개하는 데 지배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나의 사견으로는 흥분을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든 자연적 과정 중에서 오직 두 가지만이 진지하고 논할 가치가 있다. 하나는 수축성 물질의 가장자리에 얇은 암모니아층이나 젖산, 혹은 다른 어떤 강력한 자극성 물질이 존재할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전기적인 현상일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신경세포가 화학적 작용을 통해 근육에 영향을 주었거나 전기가 신경에서 근육으로 이동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수축을 유발했다는 것이다. 

      19세기 말까지는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았던 척수의 반소호를 비롯하여 신경의 역할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는 운동 통제 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신경계에는 심박을 통제하며 신경계에 억제 기능이 존재함을 증명해냈던 미주신경처럼 신체의 움직임에 관여하지 않는 신경들도 있다. 이들을 일컬어 자율신경계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셰링턴과 마찬가지로 포스터의 제자였던 케임브리시의 생리학자 존 랭리 (John Langley) 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랭리는 특히 신장 바로 상단의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알려진 작은 분비선에서 추출한 아드레날린 (신장 부근, 즉 부신이라는 의미의 아드레날(adrenal)에서 유래)이라는 물질의 효과를 연구했다. 그리고 아드레날린이 소장과 대장 및 방광의 활동을 억제하고 동공을 확장시키며 혈압을 상승시키는 등 기본적으로 자율신경계가 활성화되었을 때와 동일한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랭리의 동료였던 토머스 엘리엇(Thomas Elliott) 은 "아드레날린이란 신경충동이 말초에 도달할 때마다 작용하는 화학적 자극제일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신경에서 실제로 이 같은 물질들이 분비된다는 것을 깨달은 핵심 인물 중 한 명은 또 다른 영국인 과학자 헨리 데일 (Henry Dale) 이었다. 데일은 맥각균의 추출물 중 하나인 아세틸콜린이 사실상 심장을 멈추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는 아세틸콜린이 그저 강력한 약물일 뿐이라고 여겼고, 아세틸콜린은 무론 어떤 유사한 물질도 체내에 존재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1930년대 초에는 실험 도구들이 개선되고 아세틸콜린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효소에 의해 분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서 뢰비가 발견한 효과가 진짜라는 믿음이 커졌다. 놀라운 점은 뢰비조차 아세틸콜린이 보다 일반적인 현상을 대표하는 사례라고는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운동에 관여하는 시냅스들이 화학적 전달에 의해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냅스 전달이 전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던 이들(스파크 파)와 화학적 효과를 지지했던 이들(수프 파) 사이의 의견 충돌은 60년 전 뒤아 레몽이 처음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조명한 이래 계속해서 시끄럽게 이어지고 잇었다. 이제 논쟁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냅스 활동에 있어서 스파크 가설을 가장 열정적으로 밀어붙였던 연구자는 아마도 셰링턴의 제자였던 다소 독선적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리학자 존 에클스(John 'Jack' Eccles) 일 것이다. 에클스는 중추신경계에 속한 모든 시냅스가 전기적으로 작용한다고 믿었지만 데일을 비롯한 다른 연구자들이 제시하는 반대 증거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시냅스의 화학작용이 신경전달에서 작은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겟다고 받아들였다. 

    에클스는 1950년 대, 그가 틀렸음을 증명하는 실험 결과가 마침대 그의 연구실에서도 나오게 될 때까지 수프 가설에 대한 격한 반대를 이어갔다. 1947년에는 현재 랜쇼세포 (Renshaw cell) 라고 이름붙여진 시냅시 주변의 작은 세포가 시냅스 후 뉴런의 극성으 바꾸어 전기신호 전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게 해준다며 전기적 관점에서 억제를 설명하는 이론을 내놓았다. 렌쇼 세포가 실제로 시냅스 후 뉴런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에클스의 예측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했으며, 따라서 억제를 설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의 실험 결과를 보고하면서 1952년에 에클스의 동료들은 "따라서 억제성 시냅스 활동은 억제성 시냅스 마디에서 방출된 특수한 전달 물질이 중개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고 섰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흥분성 시냅스 활동 도한 화학 전달 물질에 의해 중개"될 가능성이 있음을 수용했다. 

     이렇듯 수프 파의 승리가 확실시되었고, 결과적으로 신경전달물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물질이 신경이 가능하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차음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시냅스 전달의 발견은 신경들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을 뿐 아니라 뇌의 작용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지배적으로 사용되던 비유법의 중대한 문제를 조명햇다. 19세기에는 신경의 전기적 활동이 발견되고 전보 시스템과 이어어 전화의 발명에 빗대어지면서 뇌의 기능을 개념화하기 위한 구조적 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서서는 이 같은 비유법이 제아무리 매력적으로 느껴질지라도 일단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부터 정확하지가 않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신경계가 무수히 많은 스위치들로 구성되어 있을지는 모르나 이러한 스위치는 일반적인 전기설비에 쓰이는 것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했다. 생물학적 발견이 기존의 지배적인 기계에 대한 비유를 앞지르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키스 교수가 왕립연구소에서 어린 청중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이야기했건 간에 뇌는 전화교환국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뇌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비유법이 필요했다.

 

8. 기계 - 190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기에서 20세기까지

 

   1922년 10월, 단 한 단어로 세상을 뒤바꿀 연극이 뉴욕에서 막을 올렸다.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 (Karel capek) 가 쓴 <R. U. R> 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18개월 앞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첫 공연을 마쳤고, 1923년에 런던에서 개막할 무렵에는 3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연극이 전 지구적인 영향력을 떨친 이유는 제목에서 스인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 이라 표현 때문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로봇'의 어원으로서, 고대 체코어로 예속(servitude)를 뜻하는 단어에서 차용된 것이었다. 연극에서는 사회가 로섬이라는 과학자가 개발한 유순한 로봇들의 노동에 의존한다. 그러다 로봇에게 인간성이라는 요소가 주어지자 로봇은 자신의 주인들을 죽여버린다. 하지만 다소 기괴하게 기계화된 육체로 이루어져 있던 로봇들은 생식이 불가능했다. 대망의 마지막 장에서 두 대의 로봇은 결국 불임을 극복해싿. 그들이 바로 새로운 아담과 이브다. 

   <<프랑켄슈타인>>을 약간 손보고 자동화에 대한 공포감을 섞고 20세기 자본주의를 향한 풍자를 가미함으로써 <R. U. R>은 언젠가는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흉내 내게 될지 모른다는, 당시 세계적으로 커져가던 흥미와 불안을 잘 표현했다.

   독립적인 오토마타를 만든다는 발상은 적어도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문화 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인간과 기계의 연결고리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20세기 초부터였다. 

    이렇듯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광범위한 문화적 다의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인간의 신체를 설명하기 위해 기계를 사용한 비유법을 열렬히 받아들였는데, 이를테면 아치볼드 힐(Archbald V. Hill)은 1926년에 왕립연구소 크리스마스 강연에서 '살아있는 기계'(Living Machinery)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으며, 1929년에는 생리학자 찰스 저드슨 헤릭(Charles Judson Herrick) 이 <<생각하는 기계>> (The thinking Machine) 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과학자들이 기계에 비유한 설명 방식을 애용했던 데는 일부 철학자들이 행동, 유전, 발달과 관련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시사하는 유물론적 관점에 반박하려는 시도를 보인 것에 대응하려는 측면되 있었다.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유물론적 기제 대신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어떤 특별한 영적인 힘으로 생물학을 설명하고자 했던 생기론의 부흥을 수반했다. 

    생기론 부흥론자들이 주요 과제로 삼았던 일 중 하나는 동물과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20세기 초반 생리학자 자크 러브 (Jackques Loeb) 와 그의 뒤를 이은 제자, 심리학자 존 왓슨(James Watson)은 과학들이 내부의 정신적인 세계를 설명할 방법을 찾기보다는 그저 인간이나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브는 대부분의 움직음을 주성(자유 운동능력을 갖춘 생물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가까이 가거나 멀어지는 등의 방향성을 보이는 운동) 과 굴성(고등식물에게서 나타나는 주성과 유사한 작용으로, 식물체의 일부가 외부의 자극에 대해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굽는 성질)이라는 단순한 기저 과정으로 설명했다. 예컨데 러브의 말에 다르면 동물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성질은 음의 주광성을 띠기 때문이었다. 신경계와 뇌의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검증 가능한 설명론적 기틀을 마련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러브의 주성과 굴성 이론은 결국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순환 정의에 불과했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에 반대했던 생기론자들은 일차적으로 두 가지 생각에 따라 움직였다. 생명체와 마음에 관한 유물론적 관점을 향항 뿌리 깊은 반대와 생명체는 발달 과정, 생리학적 구조 그리고 행동을 통해 발현되는 어떤 내적인 목적성을 지니고 있다는 목적론적 관념에 기반한 비판이 새롭게 생겨났다 이들의 주장에 다르면 유물론적 관점은 살아 있는 생명체 고유의 목표지향적인 행동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려면 모든 생명체에게 공통적으로 일종의 영적인 내적 욕구가 존재한다고 보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이 같은 생기론적 관점에 맞서는 과학자들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생리학 및 행동주의적 이론으로는 목표 지향성으로 비치는 현상을 설명할 마땅한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신경계를 모방한 기계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일부 과학자 및 기술자들이 실물이든 상상에 의존하든 어쨌든 기계를 이용해 신경계 모형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연구가 목표한 바는 오토마타처럼 단순히 어떤 행동을 흉내내는 물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생명체의 행동에 관여하고 있는 과정과 구조에 관한 통찰을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처럼 기계식 모방품을 만들어 신경계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설명하려던 시도는 무엇 하나 과학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뒤 과학자들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두고 조금 더 관념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에스토니아의 생물학자 야코브 폰 윅스쿨(Jacob von Uexkull)은 두 가지 핵심적인 통찰을 떠올렸다. 20세기 초반, 그는 독일어로 움벨트(Umwelt;물리적으로 동일한 주변 환경일지라도 소갷 있는 개별 주체들은 종에 따라 저마다 고유한 세계를 경함한다는 개념)라고 칭했던 내적 감각세계가 모든 종에게 존재하며 생태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는 개념을 조명했다. 윅스쿨은 칸트가 주장한 감각의 선험성 가설에 의거해 이 개념을 탐구했는데, 이는 "우리가 겪는 감각 인상의 본질은 선험적, 다시 말해 경험이 있기에 앞서 감각과 감각신경 그리고 감각중추라는 생리적 기관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라는 글을 남긴 네덜란드의 약리하자 뤼돌프 마그뉘스(Rudolf Magnus) 가 취한 방식과도 유사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자연선택이 어떻게 뇌와 신경계를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는지 이해하고 다른 동물을 대함에 있어, 이를테면 박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떠한 모습일지와 같은 개념을 상상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윅스쿨이 이루어낸 두 번째 혁신은 '기능환'(function circle)이라는 흥미로운 도식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그림은 신경계나 뇌가 어떻게 세상을 느끼고 상호작용하여 특정한 목적을 이루어내는지 보여주었다. 윅스쿨은 이 같은 도식을 가지고 실제로 장치를 만들기보다는 이로부터 어떻게 행동이 생겨나는지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전후 기술의 발달은 신경계와 뇌를 바라보는 과학자들의 관점을 구체화시켰다. 1929년에는 미국 예일대학교의 심리학자 클라크 헐(Clark Hull) 이 전기적인 요소를 활용한 조건반사 모형을 소개햇고, 이어 두 가지 개량 버전이 등장했다. 다수의 저항기와 기억소자가 병렬로 길게 연결되어 있으며 버튼과 조명까지 완전히 갖춘 이 장치는 사용을 거듭할 때마다 행동 양상이 변화했다. 헐의 목표는 "포유류의 복잡한 적응행동의 과학을 오래도록 따라다녔던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헐도 자신이 제시한 모형과 실제 해부학 및 생리학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생기론적 관념에 기대지 않은 채 단순한 구조와 기능으로부터 어떻게 복합적인 형태의 적응행동이 생겨날 수 있는지 밝히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기제가 이에 상응하는 유기적 과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고 명시했지만 자신의 접근법이 그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학습 과정의 수수께끼에 대한 통찰을 제시해줄 수 있을리라 여겼다.

    1933년에는 미국 워싱턴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토마스 로스(Thomas Ross) 라는 학생이 이를 더욱 발전시켜 '생각하는 기계'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논문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발표했다. 그의 논문에는 짧은 미로를 빠져나가는 길을 학습할 수 있는 전기장치에 대한 설계가 담겨 있었다. 로스는 자신의 연구가 "생각의 본질에 관한 다양한 심리학 가설들을 검증하기 위해 이러한 가설들이 수반하는 원리에 부합하는 기계를 구축하고 그 행동을 지적 생명체의 행동과 비교함으로서 가설의 타당성을 논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고 서술했다. 

   심리학 교수였던 스티븐슨 스미스(Stevenson Smith)의 도움으로 마침대 로스가 고안한 장치는 기동성을 얻게 되었고, 마치 스케이트보드 위에 자명종이 놓인 것과 같은 모습을 한, 세 개의 바퀴가 달린 '로봇 쥐'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장치는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습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실마리도 제공하지 못했다. 학습한 것을 다른 미로에 적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훈련을 진행한 미로에 아주 작은 변화만 생겨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반응에 대한 즉각적이고 고정적인 암기 방식과 시행착오 학습의 조합은 자연 세계에서 관찰되는 그 어떤 형태의 학습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마이어의 도식부터 로스의 로봇 쥐에 이르기까지, 설명 모형을 구축하기 위한 이 모든 시도들은  실제 신경계가 기능하는 방식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단순한 기계나 전기적 모형에서 출발했기에 과학자들이 모형화할 수 잇는 행동 유형 및 신경계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이 같은 모형들이 회로와 금속으로 제작되었으므로 신경생리학자들은 실제 신경계가 이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생리학계의 가장 위한 업적, 뉴런의 반응 측정

 

  신경충동의 전기적 성질은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명확해졌는데, 1868년에는 헬름홀츠의 제자 율리우스 베른슈타인(Julius Bernstein)이 음의 방향으로 분극화되는 물결이 신경을 타고 이동하는 양상이 신경충동과 정확히 동일한 역학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이론은 뉴런 안팎의 용액에 포함된 이온, 즉 전하를 딘 입자들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양극성의 칼륨 이온이 세포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한다는 것은 곧 세포 내부가 외부에 비해 약간 음극화된다는 것을 뜻했다. 베른슈타인의 모형에 따르면 뉴런의 세포막은 반투과성이어서 뉴런이 안정 상태에 있을 때는 세포 내외부의 이온 농도가 변하지 않지만 신경충동이 세포를 통과할 때는 일시적으로 세포막 해당 부분의 성질이 변화하여 소수의 이온이 막을 넘나들며 탈분극(depolarization)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오랜 기간 추측했던 바와 같이 신경충동이 전기화학적으로 전달되는 방식은 전기가 전선이나 전화선을 타고 이동하는 것과 매우 달랐다. 생물이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었다. 

    옥스퍼드대학교의 생리학 교수였던 프랜시스 고치 (Francis Gotch)는 1898년, 수많은 뉴런 다발들로 이루어진 신경섬유가 짧은 간격을 두고 연달아 두 번의 자극을 받을 경우 자극 간의 간격이 0.008초보다 짧으면 두 번째 자극에 대한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불응기라고 일컬어지는 이 휴지기는 모든 뉴런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속성이다. 고치는 운동신경을 관찰하여 얻어낸 이 같은 결과를 심장의 근육이 자극의 강도와 관계없이 오직 반응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한 가지 형태의 결과만을 내놓는다는 이른바 '실무율'이라는 기존의 잘 알려진 현상과 연결 지어 유사성을 도출했다. 

 

신경 부호의 존재, 뇌에 수학적 사고를 도입하다.

 

  이전에는 신경충동이 일종의 전달의 대상이 되는 메시지로 묘사되곤 했다. 이는 19세기 흥했던 전신기 비유법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었는데도 사실상 누구 하나 그 메시지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에이드리리언은 획기적인 실험으로 신경충동을 해체하는 데 성공하여 신경충동이 매우 간단한 파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각각의 파형들은 모두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고, 이토록 다양성이 부족함에도 신경 활동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에이드리언은 지금에야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로써는 완전히 새로운 비유를 제지했다. 

     

    메시지는 그저 일련의 단순한 신경충동 또는 다소 가까운 간격을 두고 잇따라 발생하는 파형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신경섬유에서든 파형은 모두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며, 메시지는 발화의 빈도 및 지속시간의 변화에 의해서만 달라질 수 있다. 사실 감각 메시지란 모스부호를 구성하는 연속적인 점들에 비해 크게 복잡할 것도 없다. 

 

     1920년대 중반에는 위대한 통계학자이자 유전학자인 로널드 피셔(R. A. Fisher) 와 같은 수학자들 또한 미처 단일한 정의를 정립하지 못했음에도 통계적인 개념을 설명하는 데 '정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정보를 수학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을 에이드리언이 알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도 신경 메시지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한 연구가 필연적으로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1929년 4월, 그는 친구였던 포브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차라리 처음부터 신경말단 같은 것에 이렇게까지 빠져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신경의 전기적 반응이 품고 있는 비밀이 이제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앞으로는 곧 물리학과 화학과 수학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고, 여기에 있어 나도 내 부족함을 알고 있다네, 적어도 몇 가지는 말이지. 

 

     바로 이것이 이후 수십 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신경 부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메시지에 일종의 정보가 담겨 있음을 직감한 에이드리리언의 업적은 신경계와 뇌의 작용 기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변화를 불러온 통찰 중 하나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전극과 핀에 꽂힌 채 고정된 개구리로 가득찬 실험실도, 전선과 로봇의 세계도 아닌, 먼지투성이 칠판 앞에서 이루어졌으며, 수학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과학자들이 가장 관념적인 접근법을 취하여 뇌의 기능을 모델링함으로써 가능했다.

 

9. 제어 - 1930년에서 1950년대까지

 

신경 구조에 알고리즘을 도입하다

 

      1943년 12월, 맥컬록과 피츠는 <<신경활동에 내제된 개념들에 관한 논리연산>(Logical caculus of the Ideas in Nervous Activity)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푰다. 제목이 말해주듯 맥컬록과 피츠는 뉴런이 발화하거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방식이 시사사는 바를 탐구하고 이를 논리적 표현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맥컬록은 이 같은 접근법을 생물학에 적용하기 위해 15년 넘게 고심했다. 그가 핵심적인 통찰을 얻은 것은 활동전휘의 실무율 법칙이 언제나 참 또는 거짓으로 나뉘는 논리학의 명제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였다. 뉴런 또한 발화하거나 발화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것이 바로 맥컬록이 '사이콘'(psychon) 이라고 칭했던 이른바 '미립자'를 나타내는 한 가지 예로서 다른 것들과 결합하여 보다 복잡한 현상을 이루는 기본단위다. 이제 그는 '신경망'으로 지칭한 뉴런의 활동을 명제로 표현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맥컬록은 이를 엄격한 논리어로 나타내는 것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피츠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맥컬록과 피츠가 논문에서 묘사한 열 개의 정리는 거의 한 세가 잎어 조지 불(Geroge Boole) 이 개발한 논리 대수 (Logical algebra)로써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불리언 로직 (Boolean Logic)은 기초 연산자인 'AND', 'OR', 'NOT'과 결합되어 연산을 가능케 하는 참 또는 거짓 진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맥컬록과 피츠의 야망은 감각 착각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정신활동의 모든 핵심 측면들이 "철저하게 현재의 신경생리학에서 추론 가능하다"며, 심지어 정신적인 문제들도 결국 어떤 '구조 이상' 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논문은 신경계를 고도로 관념적인 방식으로 생각해보는 일도 가능함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과거 수십년 동안 제시되었던 그 어떤 물리적인 모형보다도 훨씬 더 영향력 있는 통찰이었다. 또한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는 데 있어 피질에서 각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을 특정 짓는 국재화 개념에 기반을 두었으나 기껏해야 다양한 운동기능에 관여하는 애매모호한 '중추' 를 규명하는 데 그친, 반세기 넘도록 지배적이었던 접근법에서 마침내 크게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이러한 기능들이 실제로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하지만 맥컬록과 피츠의 연구가 정말 참신했던 점은 해부학적 영역들이 아니라 기능이 실행되기까지의 과정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이제 뇌에 대한 설명을 하려면 뉴런들의 연결망 또는 조직들 간의 상호작용 내에 체화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알고리즘을 묘사해야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주요 문제는 맥컬록과 피츠가 신경 구조의 내재적 논리라고 칭했던 구성 요소들 간의 관계 및 이들 구조로부터 기능이 발생하는 원리에 관한 사안이었다. 

     총 4,500여 건의 인용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결과적으로 둘의 논문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분야는 당시 갓 생겨난 컴퓨팅 영역이었다. 미국에서는 수학자인 존 폰 노이만이 컴퓨터에 대한 생각을 전개하는 데 이미 불리언 로직을 활용하고 있었는데, 노버트 위너 덕분에 폰 노이만은 맥컬록과 피츠의 눈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맥컬록과 피츠가 세포들이 신경계의 구조 내에서 이루어지는 'AND/OR/NOT' 연산을 체화하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기는 했지만 이들의 이론 자체는  생물학적, 기계적, 전기적 할 것 없이 모든 물질에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진 논리 (binary logic) 적 언어의 틀에 갇혀 전선과 반짝반짝 광이 나는 밸브들의 조합으로써 생각을 펼쳐나가기는 했지만 폰 노이만이 구축한 컴류팅 시스템의 구조와 논리적 제어방식에 대한 개념의 중심에는 기본적으로 맥컬록과 피츠가 제시한 가상의 신경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글의 첫머리부터 폰 노이만은 컴퓨터가 어떠한 형태일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생물학적인 비유를 사용했다.

     

     고등 동물의 뉴런은 (...) 실무율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잠잠하거나 흥분하는 두 가지 상태를 띠게 된다. (...) W.S. 맥컬록과 W. 피츠를 따라 역치, 시간적 가중(temporal summation), 상대적 억제 (relative inhibition), 시냅스 지연을 뛰어넘는 자극의 잔상 효과에 의한 역치의 변화 등 뉴런의 기능에 있어 보다 복합적인 양상들은 무시하고로 한다. (...) 이 같은 단순화된 뉴런의 기능들을 전신 계전기나 진공관으로 모사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폰 노이만은 이어서 설명했다.

        

      이러한 진공관의 배열은 진공관의 숫자 (digits)를 통해 수(numbers)를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연산체계 도한 두 개의 값을 가지는 숫자를 사용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이는 곧 이진 시스템의 사용을 의미한다. 인간의 뉴런과 유사한 이 구성 성분들은 전자와 동일하게 실무율의 법칙을 따른다. 이같은 관점은 진공관 시스템을 고려하는 모든 에비 조정 단계에도 제법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폰 노이만은 생물학적 모형을 언급함으로써 컴퓨터의 구조 및 기능 개발 방식에 있어 자신의 선택이 타당함을 보이고 있었다. 막 발명되었던 당시, 폰 노이만의 컴퓨터는 뇌와 같다고 받아들여졌다. 기계와 뇌 사이의 비유의 방향이 정반대였던 것ㅇ이다. 둘 사이의 비유가 반대로 뇌를 컴퓨터로 바라보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자리잡기까지는 뇌와 컴퓨터에 대한 연구가 사실상 가장 격동적으로 상호작용했던 몇 년간의 시간이 있었다. 

 

뇌의 연산 작용과 튜링 기계

 

      기계와 더불어 심지어 신경계까지도 정적 및 부적 피드백을 전달하는 순환 루프로 바라봄으로써 로젠블루스(Arturo Rosenblueth), 비글로우(Julian Biglow), 위너는 단순한 시스템의 활동에서 어떻게 목적성 있는 듯한 행동이 발생하는지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특히 부적 피드백, 다시 말해 장치가 사전에 설정된 목표에 이르면 특정한 기능의 수행을 멈추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맥컬록록은 로젠블루스의 발표를 듣고 자극을 받아 어떻게 하면 피드백루프를 가지고 신경증과 같은 정신질환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맥컬록과 피츠가 신경계에 내재된 논리에 관한 논물을 출판한 것과 같은 해인 1943년, 로벤블루스와 비글로우, 위너는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여 <행동, 목적 그리고 목적론>(Behavior, purpose and Teleology)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목적론, 즉 비인간 체계에서 관찰되는, 목적성을 띤 목표주도적 행동을 정적 및 부적 피드백으로 묘사했다. "일부 기계의 행동과 생물의 몇몇 반응에는 목표에 의해 행동을 취하는 주체에 수정을 가하고 방향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연속적인 피드백이 수행된다."고 말이다. 

     기계와 동물을 예로 드는 한편 수식은 배제하고 설명함으로써 로젠블루스, 비글로우, 위너는 피드백을 핵심 기제로 삼아 모든 행동을 이해하는 공통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들은 정적 피드백이 파킨슨병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떨림 등 특정한 병리적 증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로젠블루스와 비글로우, 위너가 제시한 통찰이 위대한 것은 부적 피드백이 어떻게 기계나 동물로 하여금 목적이 있는 듯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지 밝혀냈기 때문이다. 즉 특정한 활동으로 인해 어떤 주어진 상태에 이르게 되면 부적 피드백이 해당 활동을 멈추게 함으로써 마치 목적성 행동을 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 대서양 반대편에서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심리학자 케네스 크레이크 (Kenneth Craik) 가 <<설명의 본질>>(The Nature of Explanation) 이라는 얇은 책을 출간했다. 크레이크는 조건화에 대한 헐의 모양을 언급하며 자신이 특정한 시냅스의 기제를 탐구하기보다는 "신경 기제의 본질적인 특성, 즉 외부 사건들을 흡사하게 본뜨는 능력"을 살펴봄으로써 더 관념적인 접근을 택하기를 선호한다고 설명했는데, 그는 이러한 능력이 계산 기계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모든 접근법 뒤에서 아른거리다 마침내 1943년에 열매를 맺은 발상이 있었으니, 바로 앨런 튜링(Alan Turing) 이 고안한 개념이다. 1936년, 당시 24세였던 튜링은 연산 가능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연산할 수 있는 인공 장치에 대한 논리가 담긴 논문을 썼다. 그 무렵 막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튜링과 함께 일하며 그와 유사한 생각을 전개하던 알론조 처치(Alonzo Church)는 이 가상의 장치에 친절하게도 '튜링 기계'(Turning machine) 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상상 속의 튜링 기계는 기호가 적힌 네모 칸으로 나뉘어진 긴 테이프, 한 번에 한 개의 네모 칸을 처리할 수 있는 스캔헤드, 그리고 각각의 기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려주는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론적으로 이 기계는 계산이 가능한 것이라면 뭐든 계산할 수 있었으며, 이론적으로 여기에는 다른 기계를 흉내 내는 일도 포함되었다.

    처음에는 튜링도 자신이 개발한 가상의 장치를 인공지능이라거나 유기체 사이의 연결고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지만 곧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암호화 이론을 연구하며 정보이 수학적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던 당시 2세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Clude Shannon) 도 그가 벨 연 연구소에 만난 사람 중 한명이었다. 둘은 종종 점심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며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바로 전자두뇌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1937년, MIT 에서 석사논문을 쓰고 있던 섀넌은 불리언 로직이 자신이 하계 인턴 기간 동안 연구했던 벨 회사의 전화 회로 및 MIT의 버니바 부시 (Vannevar Bush) 가 개발한 기계식 아날로그 계산장치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섀넌의 통찰은 본질적으로 몇 년 뒤 맬컬록과 피츠가 깨달았던 기호를 활용해 논리학을 회로로 묘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깨달음과 동일했다. 이러한 사실은 폰 노이만의 관심을 끌었고, 훗날 그가 디지털컴퓨터에 관한 생각을 분명히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후에도 튜링과 섀넌 사이의 확실한 공통 관심거리로써 두 사람이 대화를 이어가며 서로 상대방보다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섀넌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었고, 튜링과 나는 인간의 뇌 전체를 모방할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우리가 정말 인간의 뇌와 동등하거나 심지어 더욱 뛰어난 컴퓨터를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이는 어쩌면 지금보다 그때가 더 쉽게 느껴졌던 것 같다. 우리 둘 다 가까운 미래, 아마도 10년이나 15년이면 이러한 일이 가능해지리라 생각햇다. 우리는 틀렸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튜링은 전자두뇌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관한 섀년의 몇몇 발상들에 놀라고 말았다. 일례로 튜링은 벨 연구소의 연구원 알렉스 파울러(Alex Fowler)에게 "섀넌이 그 뇌에 데이터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것들까지 집어 넣으려고 하고 있어! 거기다 음악까지 틀어주려고 하더라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간의 뇌를 흉내낸 기계

 

      해당 분야들이 하나로 결합되면서 뇌의 기능에관한 새로운 통찰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던 바로 그 시기, 폰 노이만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1946년 11월, 그는 위너에게 컴퓨터와 뇌 사이의 유사성에 치중하는 것은 아무도 잘못된 판단인 것 같다는 내용의 편지를 썻다. 그는 "튜링 및 피츠와 맥컬록의 위대하고 긍정적인 업적에 동화되고 나서 상황이 전바도 좋아지기보다는 오히려 나빠졌다"고 주장했다. 폰 노이만이 깨달았듯 문제는 실제 신경계가 맥컬록이나 피츠가 묘사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단일한 활동전위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실무율적 양상 외에는 사실상 디자털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제 폰 노이만은 "태양 아래 가장 복잡한 물체", 즉 인간의 뇌를 연구하기로 한 결정이 위너와 자신의 실수는 아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 대안으로 인간보다 단순한 개미 등의 신경계를 택하는 것도 별 도움은 되지 않았는데, 폰 노이만은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많다. 디지털 부분 (신경)이 단순화되면서 아날로그 부분 (체액)도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 실험 대상이 생각한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므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내용도 점점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폰 노이만이 내놓은 해결책은 신경계에 대한 연구를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폰 노이만은 뉴런이 진정한 디지털이 아니며, 이는 뉴런의 반응 방식 때문만이 아니라 혈압을 통제하는 등 뉴런이 관여하고 있는 피드백루프가 신경적인 요소와 생리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아 있는 유기체는 부분적으로는 디지털 기제를 취하고 부분적으로는 아날로그 기제를 택하는 등 매우 복합적이다." 아울러 폰 노이만은 뇌가 그 어떤 컴퓨터보다도 훨씬 작은 동시에 훨씬 더 만은 요소를 담고 있다고 설명햇다. (이는 그보다 1년 앞서 컴퓨터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대두되면서 결국 소형화로 나아가는 첫 단계로 개발된 트랜지스터가 아직 상용화되기 전의 일이지만 그의 말의 요지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이야 흔히 쓰이는 단어이지만 당시로써는 새롭게 느껴졌던 동사를 사용해 신ㄱ경과학에서 가장 의문 중 하나로 남아 있던 문제를 지적했다. 바로 "(뉴런)은 어떻게 연속된 수를 디지털 표기 방식으로 부호화할까?"하는 점이었다. 

   폰 노이만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일부 심리 작용일지라도 해당 연산에 관여하는 실제 신경계를 그저 부분별로 흉내만 내는 모형조차 만들기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맥컬록과 피츠의 접근방식에 근거한 인간의 뇌에 대한 그 어떤 물질적인 표상도 "물리적 우주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질까 우려를 표했다. 

    학술대회가 끝나고 몇 주 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또는 동물과 기계의 제어와 소통>>을 출간했고, 그를 기점으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위너의 책은 전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그리스어로 키잡이를 뜻하는 단어에서 차용했다)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못하는 수식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담고 있었음에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등극함으로써 과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연구물로 자리매김했다. 

    <<사이버네틱스>>에서 위너는 그가 클로드 섀넌과 함께 전쟁 기간 중에 발전시켰던 정보에 대한 새로운 수학적 개념을 설명하고, 동물이나 기계가 목적성을 띤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는 데 부적 피드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역설했다. 또한 뇌와 컴퓨터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논했다. 그도 폰 노이만과 마찬가지로 맥컬록과 피츠가 활동전위를 디지털 신호로 규명한 데서 출발했으며, 그 과정에서 튜링이 본질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했다. 위너는 이러한 기틀을 바탕으로 기억에 관한 다수의 모형을 논했다 그중에는 "뉴런의 역치 변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메시지를 대하는 각 시냅스에서의 투과성의 변화에 따라 정보가 오랜 시간 동안 저장될 가능성도 제법 그럴듯하게 여겨진다."는 주장과 같이 본질을 꿰뚫는 정확한 직관처럼 보이는 발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위너는 특히 생명체의 체내에서는 호르몬이 일종의 메시지로써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뇌와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에 초점을 맞추어 뇌와 컴퓨터를 비교하기도 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러한 생리적 신호들은 영구적으로 정해진 연결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체내에서 자유롭게 순환하면서도 특정한 집단의 뉴런에만 영향을 주는데, 그러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신호를 받는 이'가 누구인지 표시되어 있어야만 했다. 이는 컴퓨터의 작동 방식과 매우 달랐다. 

    폰 노이만은 1958년에 출간된 유작 <<컴퓨터와 뇌>>(The computer and the Brain)를 통해 남긴 이 주제에 관한 최후의 글에서 자신이 10여 년 전 전개했던 주장 중 상당수를 다시금 나열하더니 결국 마지못해 단순히 뇌가 기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뇌가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기능한다는 점이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여기에는 논리학 및 수학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익숙한 것과는 다른 논리적 구조가 존재한다."라고 언급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우리의 수학은 표면상 중추신경계가 진정으로 사용하는 수학 및 논리적 언어가 무엇인지를 평가하기 위한 관점고 절대적인 관련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론은 강력했지만 복잡한 생물학적 현실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1951년 사이버네틱스 학술 모임에서 클로드 섀넌은 스스로 미로를 학습할 수 있는 로봇을 선보였는데, 이 장치는 시행착오를 거쳐 단순하게 설계된 미로를 통과한 뒤 올바른 경로를 기억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항신경증 회로'(anti-neurotic circuit)'가 내장되어 있어 지나치게 오랜 시간 동안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데 실패할 경우 계속해서 강박적으로 같은 방식만을 밀어붙이는 대신 그때까지와는 다른 임의의 움직임을 취함으로써 올바른 해답을 찾기 시작했다. '테세우스'라는 이름의 이 생쥐를 대상으로 짧은 영상도 만들어졌는데, 해당 영상에서 섀넌은 그의 로봇이 취한 미로 풀이 방식에는 "어쩌면 뇌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어떤 일정 수준의 정신활동이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저 로스와 스미스가 1930년애에 제작했던 기계식 미로 찾기 로봇을 조금 더 정교하게 만든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 로봇과 마찬가지로 결국 학습 기제에 대해서는 그 어떤 동찰도 주지 못했다.

    노버트 위노 또한 로봇을 제작했는데, 바퀴가 세 개 달린 '나방'의 형태로, 빛에 이끌리는 성질을 띠었다. 그러다 중성자 흐름의 극성이 뒤바뀌면 이 장치는 빛으로부터 멀어졌으며, 빛을 싫어하는 빈대로 변모했다. 

    그 무렵 라티오 클럽 회원이었던 그레이 월터(Grey Walter) 도 유사한 장치를 개발했는데, 바퀴가 달린 한 쌍의 거북이 모양 로봇으로, 그 이름은 각각 '엘머'(Elmer) 와 '엘시'(Elsie) 였다. 

    라티오 클럽의 또 다른 회원 W. 로스 애쉬비 (W. Ross Ashby) 가 당시 남아돌던 영국 공군의 전자기 폭격기들을 홀용해 만든 '호메오스타트'(Homeostat)라는 기계에 관해선느 이보다 더 진지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장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합쳐진 하이브리드 형태로, 임의의 선택들을 통해 안정 상태를 찾음으로써 주변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도록 고안되었다. 호메오스타트는 적응적 행동이 일어나게 하는 데 임의의 변화가 어떻게 점진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다만 이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어떻게 우리의 감각들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비유가 될 수는 있었으나 뇌의 기능에 관한 한 여전히 어떠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마음의 본질을 찾아서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전후 세계에 이르러 마침내 뇌 기능에 관한 중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인간 뇌의 활동과 마음의 존재가 어떤 면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가정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확신은 크게 두 가지 핵심 요소가 거의 동시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여한 덕분에 가능했다. 바로 철학자 길버트 라일(Gilbert Ryle)이 1949년에 이 주제에 관해 알기 쉽게 풀어 쓴 책 <<마음의 개념>>과 앨런 튜링이 1950년에 쓴 <연산 기계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이라는 제목의 난해한 학술 논문이었다.

   튜링의 논문은 '기계도 사고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일명 '튜링 테스트'(Turing Test) 라는 것을 처음 제안하여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떨쳤다. 그가 제안한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와 동명의 기법)이란 만약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어떤 기계가 주어졌고 사람이 이 장치와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가 기계임을 탐지할 수 없다면 사실상 이 기계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논리였다. 튜링은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기계도 튜링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게 되리라 확신했다. 

      

     향후 50년 내에 약 109 비트 크기의 저장 용량을 갖춘 컴퓨터를 프로그램하여 보통 수준의 질문자라면 5분 동안의 질의응답만으로는 올바르게 정체를 가려낼 확류이 70퍼센터를 채 넘지 않을 만큼 이미테이션 게임을 잘하는 기계로 만드는 일이 가능해 지지라 믿는다. 

   

   어떻게 이를 이룰 것인지에 대해 그는 "문제는 프로그램이다"라고 생각했다. 올바른 접근법을 취하기만 한다면 물질로 구성된 튜링 기계도 분명 사고하는 것이 가능할 터였다.

   라일의 <<마음의 개념>> 덕분에 마음이 물질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독자들의 호가신은 더욱 공고해졌다. 라일의 주목적은 그가 '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못마땅하게 묘사했던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정신활동이 뇌의 물리적 활동과 동일하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논리정연한 철학적 근거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이를 증명하지는 못했다. 

    라일, 튜링, 영 같은 인물들이 마음의 물리적 근거에 관해 보였던 확신은 전쟁 이전의 개념들과는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기존의 시각이 지나고 있던 중요한 요소는 셰링턴이 80세가 되던 1937년에 에든버러에서 진행했던 몇 차례의 강연에서 잘 나타났다. 그 중 한 강연에서 그는 뇌의 기능을 묘사하기 위해 '요술 베틀'(the enchanted loom) 이라는 색다른 비유를 사용했고, 이는 곧 신경과학자들 사이에서 신기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 표현은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설명하는 구절에 등장한다.

    

    뇌가 깨어나면 그와 함께 마음이 되살아난다. 마치 은하수가 무슨 군무라도 추는 듯하다. 머리 안의 덩어리는 재빨리 요술 베틀이 되어 수백만 개의 반짝이는 북이 언제나 의미를 담고 있지만 결코 지속되지 않는, 쉽게 흩어져 버리는 패턴들을 자아낸다. 서브 패턴들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조화다. 

 

    여기서 '요술'이라는 용어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다. 때로는 서정적인 형이상학으로 표현되기도 했던 셰링턴의 주장이 결국 말하고자 했던 바는 비록 마음과 뇌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마음이 뇌 안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데카르트가 주장했듯 뇌는 그저 둘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장소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마음의 진정한 본질은 알 수 없었고, 셰링턴은 단연코 마음의 물리적 근거 따위는 없다고 여겼다. 그는 신체의 다른 부위를 구성하는 세포와 소위 생각의 근원이라는 뇌 영역에 관여하는 뉴런들의 형태나 기능에서 어떠한 차이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마음이 일종의 에너지라는 당시 유행하던 유물론적 가설을 반복적으로 비판했다. 셰링턴이 주장하기를, 마음은 절대로 물리적인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