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Culture 문화로 쓴 세계사 - 마틴 푸크너

강대원 2025. 1. 18. 12:49
1. 이집트의 네페르티티 왕비와 얼굴 없는 신

 

네페르티티 흉상;나무위키에서 가져옴

   

모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는다. 모든 독창성은 다른 사람에게 빌린 것에서 비롯된다. 문화 저장 기술이 발전하여 과거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이후 우리 모두는 후발 주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차용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차용했느냐, 또  우리가 발견한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망명한 유대 민족이 아톤 숭배 실험을 접했다 해도 그들이 이를 이용해 만들어낸 것은 전혀 다른 결과물이었으며, 어찌 됐든 위대한 성취로 기억될 가치가 있다.  - 55p-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을 지운 것이 일신교 실험 때문이었다면 이제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우리는 일신교가 만든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이집트 역사 속 이 짧은 시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긴다. 세상 사람들이 계속 다신교 안에서 살았다면 아톤 실험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나 계속 다신교 안에서 살았다면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나 역사의 각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가치관과 경험에 따라 과거를 본다. 아케타톤을 과거에 저항하는 위대한 반란이자 처음으로 잠깐 들여다본 새로운 세계로 만든 것은 바로 미래, 우리의 미래였다.  - 56p-

 

2. 플라톤, 비극을 불태우고 역사를 발명하다

 

    문화가 살아남는 효과적인 방법은 모방이었다. 즉 새로운 세대가 문화적 관행을 지켜나가도록 영감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육과 같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방법을 쓸 때에는 석판이나 알파벳에 의존하기 보다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테네 외곽 올리브 나무 숲에 철학 학교를 세웠다. 이곳은 아카데미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이에 따라 아카데미아라는 단어는 다양한 철학 학파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플라톤의 제자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승의 철학을 크게 바꾸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연극에 대해서도 더욱 긍정적이었고 우리에게 비극을 아주 자세히 설명해준다. 할리우드 각본가들도 그의 '시학'을 여전히 이용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의 사상은 대부분 교육을 중요시하고 새로운 세대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들이다. 이들의 중요한 유산은 이집트 사제들처럼 문자와 사원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었다. 도서관과 사원은 파괴될 수 있고 문자 체계는 이집트 상형 문자가 그랬듯 잊힐 가능성이 있으니 문화의 저장에만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마저 화재로 불타서 수많은 그리스 문헌이 파괴되었고 기독교 수도사들이 기독교 이전 시대의 문헌은 필사를 거부하는 바람에 또다시 수많은 작품이 사라졌다. 플라톤의 사상이 살아남은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그가 한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이 또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의 철학이 널리 알려지고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파 방식 덕분에 플라톤은 철학계 안팎에서 후대 사상가와 작가에게 다양한, 때로는 예상치 못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토피아 사회 건설에 몰두한 몽상가들은 아틀란티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았고 과학 소설 작가들은 대안적 미래라는 면에서 플라톤에게 끌렸다. 플라톤은 연극에 직접 몸담은 뒤에 모의 현실을 비판했는데, 이 비판은 새로운 매체에 맞게 업데이트되었다. 1998년 영화 '트루먼쇼'에는 미국의 전형적인 교외 지역에서 자랐으나 스스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정교한 리얼리티 TV 쇼였음을 깨닫는 인물이 등장한다. 1년 뒤에 나온 영화 '매트릭스'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주제로 삼아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의 실체를 파악하고자하는 인물들에게 빨간 약을 내밀었다. 최근 페이스북이 발표한 메타버스가 실현되면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동시에 거짓 역사와 대안 미래의 창시자인 플라톤은 분명 할말이 많을 것이다.     - 75~77p-

 

3. 아소카왕, 미래에 메시지를 보내다

바이샬리의 아소카 기둥 ; 위키백과에서 사진 가져옴

 

     아소카 왕은 과거와 문화 접촉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한 문화가 다른 문화에 선교사를 보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소카 석주 같은 문화재를 본래 자리에 그대로 놓아두어야 할까? 새로운 장소로 옮겨야 할까? 피루즈 술탄은 석주를 가져다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석주는 미래에 후대가 발견해서 이용하도록 만든 것이었다고, 아소카 왕이 정확히 그 목적으로 그곳에 세웠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문화 접촉에는 복잡하고 불안하게 뒤얽힌 파괴와 창조가 뒤따르고, 각 세대는 이를 헤쳐나가야 한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과거를 파내어 새로운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과정에서 문화를 단절시키고, 오해하고, 오독하고, 차용하고, 절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범한 아소카 왕과 그가 세운 석주에서 배워야 할 진정한 교훈은 이처럼 복잡한 파괴와 창조의 뒤얽힘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소카 석주는 세워지고, 버려지고, ,오해받고, 잊히고, 재발견되고, 옮겨지고, 마침내 다시 해독되었다. 석주의 메시지가 영원히 잊히지 않기를. - 99~100p-

 

4. 폼페이의 남아시아 여신

 

     다른 언어로 된 다른 문화권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현재 우리는 대부분 번역을 통해 그리스와 로마 문학을 읽는다. 문학은 번역을 통해 그 탄생지 바깥에서 유통되면서 세계문학이 된다. 그러나 고대에는 다른 문화권의 문학을 번역4하는 일이 드물었다. 가장 흔한 예외는 농업과 의학, 종교 문헌 같은 실용 지식에 대한 매뉴얼 번역이었다. 불교 문헌은 인도어에서 중국어로 번역되었고,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그리스어를 쓰는 유대인들은 히브리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다른 문화권의 정전(正典) 전체를 번역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적어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번역을 통해 다른 문화권의 문학을 일상적으로 즐기고 있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로마인들이 놀라운 문화적 접목 실험의 일부였다. 그리스 문화에서 로마 문화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는 잘못된 생각이 퍼진 것은 이 실험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접목이 잘 통했던 것이다. - 116p-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아스를 선택함으로써 귀중한 것을 얻었다. 바로 그리스와의 거리감이었다. 그는 로마의 선사 시대를 그리스 선사 시대에 봉합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짜임에 새로운 실을, 그리스와 관계없이 트로이와 로마를 연결하는 실을 엮어 넣어 승자인 그리스를 로마 건국이라는 드라마의 구경꾼으로 만들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그리스인들은 승리에 취해 아이네이아스가 달아나도록 내버려둔다. 그리스인들의 이야기에서 아이네이아스의 역할은 끝났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에게는, 로마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로서는 이야기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이 서사시는 그리스가 압도적으로 중요했음에도, 또 베르길리우스가 그리스의 근간을 이루는 두 이야기에서 큰 영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마가 그리스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트로이 전쟁의 패자를 선택한 것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 로마인들은 그저 그리스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를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이용해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선조로 설정한 트로이인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 121p -

     로마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가 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아스"는 문화 접목의 영광을, 그 가능성과 미묘한 방법을 보여준다. 문화 접목은 패배나 열등함으로 인한 행동일 필요가 없다. 로마 문화의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는 영향력 면에서 몇백 년, 아니 몇 천 년 동안 그리스 극작가들이 그 어떤 작품보다고 뛰어난 희곡을 썼다. 로마 건축가들은 그리스 모델을 바탕으로 새로운 건물과 사원 양식을 만들어냈고, 로마 조각가와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풀르타르코스는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한 쌍으로 묶어 그들이 얼마나 비슷한지 보여주는 위인전을 씀으로써 두 문화를 하나로 결합했다. - 122p -

 

5. 고대의 흔적을 찾는 불교 순례자

현장법사 ; 나무위키에서 사진 가져옴

    문화의 이동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힘, 즉 수입된 문화의 머나먼 기원에 대한 유혹이 현장을 인도로 이끌었다. 외국에서 수입된 문화에 매료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아는 것이 진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단편적으로 걸러진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을 거치며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걱정한다. 따라서 기원에 대한 갈망이, 그 문화적 혁신을 본래 상태 그대로나 적어도 남은 흔적을 통해 즐길 수 있는 곳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현장은 그저 부처가 남긴 것을 숭배해야 했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 즉 순례자가 되었다. - 133p- 

 

      현장은 자신의 유교적 배경에 대해 성찰하면서 이 여행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현장은 인도인들이 그러하듯 인도가 부처의 탄생으로 축복받은 땅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렇게 고생하며 인도까지 간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영원히 인도에 매여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현장은 불교의 기원을 찾는데 삶의 많은 부분을 바쳤지만 불교 경전과 휴대할 수 있는 작은 조각상 형태로도 그 기원을 이식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 140p -

 

    현장이 대표하는 것은 그가 번역가로서 한 일보다 중요하다. 그는 수입된 문활르 쫓아서 그 근원을 찾아간 사람을 대표한다. 문화 수입은 복잡한 역장(力場)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수입된 문화가 새로운 현지 문화 (host culture) 에 이미 오래전부터 동화된 후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수입 문화의 기원을 찾아가면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중국 불자들은 인도에 끌렸으나 감히 서역으로 위험하고 금지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현장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다녀왔다. 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가 성지를 방문하는 경험이 과대평가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점이다. 현장이 가지고 돌아온 경전과 물건, 관찰과 경험 덕분에 중국 불교는 부처의 고향인 인도의 불교에 열등ㄱ암을 느낄 필요 없이 번성할 수 있었다. 현장은 중국 불자들에게 집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준 순례자였다. - 143p - 

 

6. ≪베갯머리 서책≫과 문화 외교의 위엄

 

     불교 예술가들은 완벽한 평정을 찾으려 애쓰면서 부처의 얼굴, 자세, 여타 특징을 표현하는 정교한 체계를 발전시켰다. 목적은 해부학적 특징을 세세하게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교리의 핵심인 초연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있었다. 정적(靜寂)을 표현하기 위해 부처는 거의 항상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힘을 빼고 있다는 뜻에서 팔다리와 몸통을 둥그렇게 표현했고 근육이나 힘줄에서도 움직임이나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 구조에 대한 고민도 필요 없고 몇백 년 뒤 일부 유럽 화가들과 달리 시체를 해부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주의는 오히려 불자들이 믿는 모든 것과 어긋났다.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면 감상자는 특정한 것에, 놀랍고 예외적인 데 집중하게 된다. 그 대신 불교 조각은 부처가 상징하는 공(空)의 철착을 포착하려 애썼다. - 158p -

 

    일본의 경우는 다른 문화를 자발적으로 차용하면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큰 자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화 차용은 이와 동시에 후발 주자라는 느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경쟁심을 불러올 수밖ㅇ 없다. 아마도 그리스나 로마의 경우와 달리 전쟁에서 패한 적의 문화를 수입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상대방에서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반발심이 생겨 경쟁의식이 특히나 강해질 것이다. 엔닌의 일기는 중국에서 일어난 불교 수입에 대한 반발을 대상이 되었다. - 165 p -

 

     엔닌의 일기와 기비 두루마기는 문화 수입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지만 일본의 문학, 회화, 조각, 건축, 불교와 불교 예술 형식이 전혀 파생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로마의 경우가 그랬듯이 자발적 문화 수입은 새롭고 독창적 문화를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렇게 생겨난 문화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독창적인 작품들 중에서도 세이 쇼나곤의 ≪베갯머리 서책≫은 매우 중요하며 세이 쇼나곤은 이 책으로 세계문학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일기 마지막 부분에서 세이 쇼나곤은 독자들에게 이 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말해준다.

      어느 날 고레치카 내대신께서 중궁께 종이 한 묶음을 헌상했다.

       "여기에 무엇을 쓰면 좋겠는가?"  중궁이 물으셨다. "황제께서는 ≪사기≫를 쓰셨다는군."

       "그럼 이건 '베갯머리 서책'을 쓰시면 옳을 줄로 아옵니다." 내가 제안했다. 

       "아주 좋구나. 자네가 갖도록 하게." 중궁이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내게 종이를 주셨다. 그 많은 종이를 다 채우려고 내가 온갖 이야기를 적다 보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나는 전체적으로는 흥미로운 일이나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할 만한 일에 대 썼다. - 166~167p -

 

     우리는 문화를 평가할 때 독창성을, 언제 어디서 처음 발명되었는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원조라는 주장은 종종 우월성과 소유라는 미심쩍은 주장을 뒷받침할 때 사용한다. 그런 주장은 편리하게도 모든 것이 어딘가에서 왔음을, 발굴되고 적용되고 옮겨지고 구매되고 도난당하고 기록되고 복사되고 종종 오해받는다는 사실을 잊는다. 무언가가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이다. 문화는 거대한 재활용 프로젝트이며, 우리는 다음에 사용될 때를 기다리며 그 유적을 보존하는 매개자에 불과하다. 문화에 소유자는 없다. 우리는 다만 다음 세대에 문화를 물려줄 뿐이다. - 168p -

 

7.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가 되다

 

     새로운 도시 건설은 건축가의(그리고 통치자의) 꿈이다. 바그다드는 지형의 자연적 윤곽을 따르는 대신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프 알 만수르에 의해 완전히 다른 원칙, 즉 기하학에 따라 건설되었다. 완벽한 원형으로 지은 바그다드는 유일한 중심으로 떠오르는 아랍의 힘을 상징했다. 새로운 도시 건설은 아직 젊은 제국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무에서 시작하면 새로운 도시가 옛 건축물의 구조나 기존 지배 계급에 맞설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통치자는 새로운 유형의 중심지를, 정치적·물질적 권력을 집중시켜 새로운  유형의 제국을 통치하도록 특별히 고안한 곳을 꿈꿀 수 있었다. (네페르티티와 아케나톤이 신도시 아케나톤으로 궁정을 옮긴 것이나 1960년 브라질이 브라질리아 수도 이전, 2002년 미얀마의 네피도 수도 이전도 비슷한 경우이다.) - 173p -

   

      바그다드에 축적된 지식은 우리가 STEM  이라고 부르는 것, 즉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수학(Mathematics) 과 인문학을 모두 아울렀다. 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체계가 지식을 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바그다드에서는 의학 논문과 천문학, 수학뿐 아니라 문학과 역사서가 나란히 늘어서서 후대에 전해졌다. 학자들은 지식 분야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바그다드의 통치자와 학자는 과거에 만들어진 다양한 지식 분야가 현재에도 유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 177p -

 

      다행히도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가 동로마 제국의 역할을 물려받아 고전 세계를 보존했다. 인도에서 근거지를 잃은 불교가 번역을 통해 중국에서 번성하고, 중국에서 박해받자 일본에서 계속 이어진 것과 비슷하다. 바그다드는 이런 식으로 지식을 넓혔고, 출처가 어디든 다양한 문화의 가르침을 권력의 중심지에 저장하고 번역했다. 바그다드 학자들은 멀리서 온 지식을 추구하면서 선지자 무함마드가 했다는 유명한 말을 따르고 있었다. "[멀리] 중국에서 왔을지라도 지식을 추구하라. 지식 추구는 모든 이슬람교도의 종교적 의무이다." - 179p -

 

      바그다드 번역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이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아랍 제국에 그리스 지식을 도입해도 이슬람이 약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룬 알 라시드와 그의 아들은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이슬람이 더욱 날카로운 도구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먼 곳에서든 과거의 지적 유산에서든 그 도구를 찾을 생각이었다. 여러 노와이 전통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현재 문화는 예전 문화가 만들어낸 것을 배움으로써 더욱 강하고 정교해졌다. 또한 노와이에는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전할수 있는 기술적 측면, 즉 논쟁 형식, 논리적 일관성, 작법과 사고 기법이 많았다. 이슬람 성직자와 통치자들은 번역 프로젝트를 통해 사고 도구를 익혀서 다른 종교 대표자들과 토론할 수 있었다.  - 180p -

 

      숨마를 집필하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생각을 설명하는 것과는 달랐다. 이븐 시나는 점차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벗어나면서 이를 정당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책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어떤 것으들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면서 이제는 주해를 다는 학자들이 숨겨진 내용을 공개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필요한 책을 손에 넣을 수 없어서 의도치 않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너무 멀어졌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숨마라는 프로젝트 덕분에 각종 지식 속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가장 화급한 지적 도전이었다.

 

      이븐 시나가 이용 가능한 지식을 포괄적으로 종합한 방법은 이후 몇백 년 동안 철학을 연구하는 방식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인문학 연구 대부분은, 계속 바뀌긴 하지만 정전(이븐 시나는 이 용어를 수집하여 아랍어로 카눈(qanun)이라고 불렀다.)을 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과거를 보존하면서 현재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이며 사상과 논의를 저장하고, 문화권을 초월하여 현재로 번역하는 우리의 능력에서 나온다. 그것은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는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으로 다양한 시대와 장소의 지적 자원을 수집, 보존, 결합, 집중하는 데 중점을 두는 인문한 연구 방식이다. 

     숨마는 나중에 이용하기 위해서 수집하고 보존해야 할 중요한 저작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탄생한 정보 관리 방법이다. 아마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생각일 것이다. 우리는 저장의 중요성뿐 아니라 조사, 수집과 메타데이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정보의 과잉에 전율하고 당황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에 접근할 수 있지만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 187~188p -

 

     우리는 남은 흔적을 통해서 지혜의 창고를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어마어마했고 바그다드뿐 아니라 아랍 제국 전체를 배움의 중심지로, 새로운 형태의 지식 보존과 생산이 개발된 곳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지혜의 창고는 단독 건물이 아니라 지식을 수집, 번역, 종합한다는 아이디어, 즉 단일한 장소가 아니라 과거와 다른 문화의 산물을 대하는 태도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이븐 시나는 한곳에서 꾸준히 작업하거나 자기 책을 계속 소유하는 사치조차 누리지 못했지만 그의 저작은 매우 중요했다. - 190~191p -

 

 

8. 에티오피아 여왕, 계약의 궤 약탈자를 환영하다

 

     에티오피아는 계약의 궤를 훔쳤다고 주장하면서 유대 왕조의 직계 후손임을 선언하고 에티오피아와 유대 왕조를 연결짓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텍스트 번역이나 유물 수입보바도 훨씬 단단한 왕조 계승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러한 문화 접목이나 이전을 추구하는 것이 ≪케브라 나가스트≫만은 아니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를 세운 사람이 트로이의 아이네이아스라고 선언했고, 페르시아 ≪왕의 서(Book of Kings)≫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공주의 숨겨진 아이였으며 따라서 이스칸다르라는 이름의 페르시아 왕으로 칭송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브라 나가스트≫는 왕조의 후손과 약속의 궤 절도를 결합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뿐이다. 이에 따라 에티오피아는 성경적 기원을 주장하는 동시에 중요한 종교의 중심을 예루살렘에서 악숨으로 옮길 수 있었다. ≪케브라 나가스트≫는 절도로 위장한 전략적 차용이라고 할 만한 매혹적인 예이다. - 200p -

 

      ≪케브라 나가스트≫는 때때로 엉뚱한 융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평가되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종교적·문화적 차용의 기저 역할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케브라 나가스트≫는 그것이 추구하던 원전(히브리 성경)에서 등을 돌린 차용 행위로 설명할 수 있으며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선언한 문화(유대교)에서 나왔음을 인정함으로써 연속성과 단절을 모두 만들어낸다. 이것은 견당사를 풍자하는 기비 두루마리 그림과 다르지 않다. 또한 ≪케브라 나가스트≫는 기독교가 유대교를 상대로 내세우는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셈이다. 즉 그 후손임을 주장하는 동시에 신성한 과거의 소유권을 놓고 (진짜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과) 경쟁한다. ≪케브라 나가스트≫는 솔로몬의 에티오피아인 아들과 궤의 절도라는 이야기를 통해 계승과 절도라는 문화 차용의 두 작용을 명확한 형태로 보여준다. 이는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며 후발 주자가 파생이라는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결국 문화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는 후발 주자다. 우리는 항상 우리보다 앞선 문화와 맞서며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 204p -

 

    이슬람의 부상과 확장은 종교 이동과 선택적 융합의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선지자 무함마드는 히브리 성경을 추종하지 않았지만 그가 필경사들에게 구술하여 나중에 ≪코란≫이 된 그의 예언은 성경에서 이야기와 인물을 빌려오며 그 소재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슬람굔느 기독교보다 히브리 성경과 거리가 멀지만 선택적 차용 프로젝트, 즉 오래된 경전을 서사 자원으로 간주하는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선택적 차용에는 시바 여왕과 그녀가 솔로몬 왕을 찾아가는 이야기도 포함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관계나 궤의 절도는 언급되지 않으며, 두 사건은 ≪케브라 나가스트≫ 에만 등장한다.)  - 207p -

 

    에티오피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라스타파리아니즘은 때로 잡탕이나 온갖 관습이 섞인 잡동사니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 운동을 고대 에티오피아처럼 문화 전이와 융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로 보아야 한다.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은 유럽 식민주의자가 제안하는 미래와 전혀 다른 미래를 약속하는 과거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아주 멀었지만 그들에게 무척 유용한 문화자원이었다. 이것은 많은 면에서 ≪케브라 나가스트≫ 와 무척 유사한 전략적 차용이었다. 라스타파리안은 머나먼 나라에서 독특한 무언가를, 시간과 공간의 드넓은 간극을 넘어 자신들의 문화사를 다시 쓸 기회를 보았다. 그 결과는 아프리카나 아프리카 역사로의 단순 회기와는 무척 달랐다. 독특한 음악과 여타의 전통을 포함하면서 고대 에티오피아 텍스트를 자메이카의 경험과 결합한 무척 독창적인 문화가 탄생했다.  - 214p -

 

9. 어느 기독교 신비론자와 세 번의 유럽 부흥

 

    아마도 과거에 쇠퇴가 일어났음을 알려주는 가장 명확하고 의미심장한 신호는 부흥, 즉 현실이든 상상이든 과거의 영광스러운 시대로 돌아가려는 시도일 것이다. 샤를마뉴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그는 현재의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공화국, 크로아티아 대부분의 통치를 통합했고 자신의 영토가 서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엑스라샤펠에 있었지만 그의 옥새는 레노바티오 임페리어 로마노룸(Renovatio imperii Romannorum(로마 제죽의 재건)을 천명했다. 샤를마뉴의 재건 프로젝트에 왕관과 옥새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한 우리 선조들이 소홀히 하여 이제 거의 잊힌 문학 작품을 복원하고 싶었다. - 219p -

 

    그의 궁정에 모인 책과 필사본은 해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유럽 각지의 필경사들은 극명하게 다른 필체와 약자. 문자를 썼다. 따라서 샤를마뉴와 그의 고문들은 아주 새로운 저술 문화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는 곧 새로운 서체를 뜻했다. 새로운 서체를 쓰면 판독이 쉬워질 것이고, 따라서 샤를마뉴의 영토 내에 있는 필경사들은 서로의 글을 해독할 수 있고 학생들은 더욱 빨리 실력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서체는 카롤링거 서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 221p -

 

    베네딕토회 수도원과 수녀원은 단순히 독실한 기독교인이 기도와 선행에 삶을 바치는 곳이 아니었다. 수도원은 지식을 보존하고, 수정하고, 전파하는 곳이다. 베네딕토회의 나태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대내적으로 농사를 짓는 수도원에서는 엄격한 육체노동 제도로 이어졌다. 하지만 노동은 읽기와 쓰기도 의미할 수 있었다. 학교나 개인 도서관 같은 로마 제국의 옛 제도는 점차 쇠퇴했고 수도원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레굴라 베네딕티≫는 이 역할을 의식하여 책을 어떻게 배포해야 하는지, 어떻게 빌릴 수 있는지, 언제 반납해야 하는지 아주 신중하고 구체적으로 정해서 도서관을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뛰는 심장으로, 아니 적어도 하나의 심방으로 만들었다.  - 225p -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본질적으로 광범위한 지식을 보존하기보다는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었다. (따라서 바그다드 지혜의 창고와는 매우 달랐다.) 기독교 이전의 고대 작품은 우연히 또는 간접적으로 살아남은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고대의 작품이 담긴 귀중한 양피지에 기독교 텍스트를 덮어쓰는 바람에 살아남을 때도 있었다. 팔림프세스트(Palimpsest) 라고 하는 재사용된 양피지에 본래 적혔던 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옛날 작품을 재발견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 227p -

 

    문화사에서 종종 그렇듯 파괴 세력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십자군은 아랍에서 학자들이 쓴 지식의 요약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발전했고 그리스 철학의 아랍어 번역본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 결과 비잔티움, 바그다드, 카이로, 알 안달루스에서 유입되는 문헌이 증가했고,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들어왔다. 기독교 작가들은 잃어버렸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발견했고 이븐 시나와 같은 양식으로 숨마를 쓰기 시작했다. 유럽의 지식 생산을 바꾸어놓은 이러한 유입을 두 번째 부흥을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재탄생은 아니지만 경쟁하는 두 제국의 문화 접촉이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키케로 같은 고전 작가에 대한 흥미가 새롭게 살아나면서 부흥과 차용이 동시에 일어났다.   - 235~236p -

 

    유럽 대륙이 스스로를 전적으로 기독교라고 간주할지, 어쨌든 이슬람교는 아니라고 간주할지를 둘러싼 논쟁에 비추어볼 때 아랍의 사상과 제도가 12세기 유럽에 끼친 영향은 특히 중요하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든 말이 되지 않는다. 12세기의 부흥은 기독교 유럽을 결정적으로 형성했다. 그 덕분에 유럽은 이슬람 사상가들이 그리스 및 로마의 영향과 페르시아를 비롯해 멀리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향을 결합해서 쓴 철학적 저술을 물려받았다. 유럽과 이슬람의 역사와 사상은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다. 이제 와서 그 둘을 분리할 수도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된다.   

   르네상스. 우리가 보통 이 말로 가리키는 대상은 샤를마뉴가 문예 프로그램을 실시했을 때나 힐데가르트가 수도원 제도를 이용할 당시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미래의 사건, 바로 15세기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다. 이전의 두 부흥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재탄생이라기보다는 반쯤 잊힌 채 다른 곳에서 재수입해야 했던 지식의 재사용이었다. 다시 말해 이탈리아 여러 도시 국가에서 발생한 차용된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는 야심적 통치자들이 조만간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정의하고 악명을 높일 형태의 정치를 하고 있었다. 이 무자비한 정치 형태에는 문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 236~237p -

 

    샤를마뉴의 궁정 도서관, 베네딕토회 수도원 필사실, 12세기의 대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스투디올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보존하고 재생산하고 확장했다. 각각의 목적이 달랐으므로 과거를 되살리는 전략도 달랐다. 이러한 장치들은 기독교라는 틀 안에서 서로 다른 문헌과 앎의 방식을 우선시함으로써 서로를 보완했다. 각 장치에서 기독교라는 틀은 다른 의미를 가졌으므로 각각은 기독교 이전의 과거를 다르게 이해했다. 또한 차용한 부흥의 세 물결, 즉 세 번의 르네상스로 인해 고대의 텍스트를 점점 더 많이 보존하고 수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샤를마뉴, 힐데가르트, 데데리코처럼 무척 다른 유럽인들이 과거의 무언가가 사라졌으며, 다른 곳에서 되찾아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를 후발 주자로 생각했고 무엇이 사라졌는지 돌아보며 그것을 복원하려 했다. - 245p -

 

10. 아즈텍의 수도, 찬사와 함께 파괴되다
11. 포르투갈 선원, 올림푸스의 신을 만나다

 

 . 카몽이스가 살던 시대에 갑자기 그리스와 로마의 예술과 문학이 다시 관심을 끌었다. 이탈리아에서 학자와 시인이 사라진 로마와 그리스 문화의 필사본과 유물을 찾으려고 애쓰면서 고대 세계의 재발견이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에서 일부 유물을 수입하기도 했다. 오비디우스의 편지, 플라톤의 대화를 비롯해 ≪오디세이아≫와 ≪아이네이스≫ 가 당연히 본보기로 떠올랐다.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을 재탄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부흥이 여러 번 일어났으며 이번 재탄생에서도 매개자로부터 많은 것을 차용했다는 사실은 편리하게 무시했다.

    포르투갈은 르네상스의 후발 주자였지만 극동에서 부가 쏟아져 들어오자마자 다른 나라들을 빠르게 따라잡았다. 상인과 지리학자가 동양의 최신 발견을 보려고 리스본을 찾아갔듯이 유럽 전역의 학자와 교사들도 우리가 지금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배우러 포르투갈에 왔다. 인문학은 대부분 과거 필사본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한 지식 형태, 과거의 것을 편집하고 비평하고 숙고하는 학문이었다. 몇백 년 전에 설립한 코임브라대학은 사고와 논쟁을 바탕으로 하는 지식,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근본적 의문에 과거 세대가 찾은 대답을 두고 토론한느 지식의 중심지였다. 대수도원 내에 고위 귀족을 위한 대학과 하급 귀족 및 부르주아지를 위한 대학을 따로 설립했다. 그러나 대학의 중심은 자그마치 10만 권이 넘는 책과 필사본이었다. 인도의 집과 마찬가지로 코임브라대학은 지식을 이용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할 목적으로 자료를 보관했다. - 286p -

 

    문화가 살아남아 번성하는 방법에는 카몽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에서 훔쳐오는 것뿐 아니라 다른 문화에서 발견한 놀라운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도 있었다. 카몽이스는 다른 문화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우스 루지이아다스≫ 는 오해와 무지, 오만, 폭력뿐 아니라 동등하지는 않다 해도 서로 이익을 얻고 서로 지원하는 문화 대충돌의 흥미진진한 기록이다.- 293p -

 

    ≪우스 루지이아다스≫ 가 포르투갈 제국의 몰락에서 어떤 역할을 했든 이 작품은 의미 만들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과거를 이용해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위험하다. 무지와 폭력으로 다른 문화를 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문학의 힘을 이용해 독자를 자극하는 것은 위험하다. 특히 인쇄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 300p -

 

12. 생도맹그와 파리 살롱의 계몽주의

 

 . 행동과 마찬가지로 사상 역시 의도하지 않았거나 희미하게만 인식하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자연권 사상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독립 선언>에 서명한 사람들 중에서 자연권이라는 새로운 언어가 여성과 노예에게 적용되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선언문의 틀을 마련한 사람들은 예외를 분명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여성과 노예는 규칙의 예외가 아니라 언급할 필요도 없이 단영히 빠지는 대상이었다. 노예 제도는 가부장제와 똑같은 삶의 현실이었고, 프랑스와 북아메리카 식민지 13주를 풍요롭게 하는 사회경제 체제의 일부였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 314p -

 

 . 노예 제도가 잔인한 것은 노예 감독과 주인이 비인간적이라서가 아니라 경제 체제가 한 집단의 착취에 기반을 두기 때ㅣ문이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노예 제도에 얽혀 있으며 따라서 노예 제도에 의존한다는 의미였다. 농장주뿐 아니라 해방 노예, 혼혈 자유민, 농장을 소유하지 않은 프랑스 식민지 주민, 보르도와 파리의 부르주아지, 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부당이익 체제는 생도맹그의 노예 반란 당시 다양한 집단이 각종 협정과 임시 동맹을 맺으면서 그토록 복잡한 상황을 빚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 325p -

 

 . 생도맹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계몽주의의 변방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크나큰 실수다. 생도맹그야말로 계몽주의 사상의 힘과 모호함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도맹그는 무엇보다도 사상 자체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인이 사상을 포착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해하고 자신의 목적에 맞게 이용해야만 한다. 철학자 G.W.E. 헤겔은 나폴레옹이 시대정신의 구현이며 말 등에 탄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폴레옹이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렸으니 딱 맞는 표현이다. 그러나 루베르튀르가 더 좋은 예였을 것다. 그는 말 등에 걸터앉아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전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328~329p -

 

 

13. 새로운 과학에서 역사 소설이 탄생하다

 

 . 진보하는 역사라는 개념은 해방과 민주화를 통한 정치적 발전이든, 강력한 기계를 통한 기술적 발전이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물건을 이용할 수 있게 된 물질적 발전이든, 스스로 계속 발전하고 있으며 이를 되돌릴 수 없다고 믿는 사회적 산물이었다. 이러한 발전이 어디서나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각 분야의 발전은 19세기 영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결합했고 영국에 사는 사람들, 적어도 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정치적 해방, (증기기관으로 대표되는)기술 혁신, 식민지 영토에서 짜낸 부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궤도 위에 있다고 생각햇다. 

     진보가 여러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된다는 생각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과거에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한 해가 지나면 다음 해가 온다는 사소한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갈수록 과거를 낯설게 만드는 변화로 인해서 질적 의미에서도 그러했다. 모든 것은 변화하며 새로운 환경이 사람들과 그들의 삶과 경험, 생각과 감정까지 바꾸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생겨났다. 무작위적 변화가 아니었다. 온갖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변화를 겪었다. 중요한 것은 변화를 한 방향, 즉 앞을 향해서만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과거는 축소되고 쇠퇴했다. 건물이 파괴되고 필사본이 사라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앞으로 전진한다는 것은 곧 현재와 과거가 점점 더 멀어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사라지는 것들을 복원하거나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물관은 과거로부터 회귀이자 방문객들이 잠시나마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게 해주는 타임캡슐이었다. - 338~339p -

 

      일부 역사가는 새로운 방법을 강조한 반면 일부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영국 귀족 토머스 매콜리가 후자에 속하는 대표 인물이었다. 맼놀리는 모든 사건이 더 큰 자유와 번영을 향해 가자 없이 전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사회와 지역의 역사에 새롭게 초점을 맞추었다. 지리학 지식과 특히 인도 식민지 행정관으로서 겪은 경험도 이러한 진보 개념에 영향을 끼쳤다. 매콜리가 보았을 때 역사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장소, 즉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식민지 등 다른 지역은 후진국이었으므로 현대화해야 했다. 매콜리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잔혹한 식민주의를 지지할 때 이용하던 문명화 사명을 옹호하면서 영국의 문학과 역사에 초점을 맞춘 교육 체계와 새로운 형법을 만들어서 인도에 도입했다. 역사가이자 식민지 행정관이라는 그의 경력은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과학이 식민지 착취뿐만 아니라 누가 발전하고 있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 나누는 잘못된 사상들과 깊이 얽혀 있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 340~341p -

 

    새로운 역사과학은 또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물건은 박물관에 주의 깊에 보관했고 폐허는 그대로 남겨 유적으로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태도가 당시에는 새롭고도 직관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옛날 건물에 관심이 있다면 왜 처음 세웠을 때처럼 보이도록 재건하지 않을까? 왜 망가진 꽃병이나 그림을 최대한 새것처럼 보이도록 고치지 않았을까? 과거를 다루는 과학에 따르면 과거를 고치지 않고 불완전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이제 폐허를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감탄하고, 배우고, 손대지 말아야 하는 과거의 경이로운 가르침으로 여겨야 했다. 그러자 필연적으로 원본 숭배가 등장하여 유명한 그림과 조각품의 복제품을 무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초기 수집가들은 복제품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복제화를 가지고 있던 마담 조프랭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갑자기 복제품은 천박한 것으로, 고귀하고 귀중한 유적과 예술품을 가치 있게 만드는 세월과 고색이 결여된 것으로 전락했다. - 341~342p-

 

    헤겔은 철학이란 광활한 시간과 공간을 날아다니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라고 상상했다. 그때까지 철학은 진실을 밝히는 것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밑그림을 그리고 이븐 시나가 정교하게 다듬은 추상적 원칙에 주로 관심을 두었다. 분명 다양한 철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다양한 사상을 연구하는 이유는 예를 들어 숨마, 주해, 또는 새로운 논문을 통해서 세상을 볼 때처럼 포괄적인 시야를 얻는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사상을 찾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마담 조프랭의 살롱에 모인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옛 철학자들이 거짓 신앙과 권위에 의지하기 때문에 쓸모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현재에 유용한 사상을 발견할지도 몰랐으므로 고대 철학사를 계속 읽었다. 

    헤겔은 역사적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새로운 원리를 철학에 도입했다. 그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고가 발전하는 과정을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제 진실을 찾기 위해 과거를 연구해서는 안 되며 과거는 과거대로 연구해야 했다. 철학자는 사상의 역사가가 되었다. 

     헤겔의 접근 방식은 진보적 역사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라는 논쟁을 구체화했다. 헤겔에게 그 원동력은 생각이었다. 포이어바흐에게는 물질적 환경이었다. 찰스 다윈에게는 환경이 인구와 종(種)에 가하는 압력이었다. - 344~345p -

 

 

14. 일본 예술을 향한 침략과 사랑

 

 . 페놀로사의 유고 작업에서 이루어진 독특한 협력이 보여주듯이 모더니즘은 단순히 과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운드 같은 모더니스트들은 박물관이라는 형태의 과거뿐 아니라 식민지 탐험과 세계 무역을 통해 서구에 밀려 들어오는 머나먼 문화의 예술 작품의 물결에 처음으로 대항하는 중이었다. 서양의 일부 비평가들은 일찍이 이러한 물결을 겪었다. 독일 잘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산스크리스트어 극, 페르시아아 아랍의 시, 중국 소설을 접한 후 1827년에 '세계문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자족적이고 고립되어 있던 서양 예술은 먼 곳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걸작과 대중 예술을 점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는 《길가메시 서사시》처럼 최근에 발굴된 것도 있고, 세이 쇼나곤의 《베갯머리 서책》 이나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처럼 최근에 번역된 것도 있었으며 호구사이의 <거대한 파도>처럼 최근 들어서야 전 세계에 유통된 것도 있었다. 

     그 결과 전통이 크게 무너졌다. 전통의 붕괴를 방향감각 상실로, 새로 들어온 수많은 예술 작품과 사상에 동화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또한 해방으로, 예술가가 옛것과 새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조합해 새로운 형태를 실험해 볼 기회로 인식할 수도 있었다. 모더니스트는 후자에 속한다. 그들은 방향감각 상실을 재앙이 아니라 새것의 출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고 심지어는 환영할 만한 상황으로 여겼다. 동료 예술가들에게 "새롭게 만들라"고 촉구하는 에즈라 파운드의 말은 바로 이런 의미였다. 즉 과거를 전복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방향 상실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라는 뜻이었다. - 380p -

 

 

15. 나이지리아 독립과 셰익스피어

 

 .  소잉카는 요루바 전통을 회복하고 독립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라디포와 달리 영어를 택했고, 새로 독립한 나이지리아에 영어 극장을 세울 생각으로 극단을 만들었다. 영어를 선택한 것은 그가 문화 혼합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소잉카는 몇몇 동시대인들과 달리 자신이 배운 영국, 프랑스, 그리스 문학과 집중적으로 연구한 셰익스피어를 버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 식민 통치가 그를 만들고 나이지리아를 만들었으며, 나아지리아의 역사와 문화에서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문화적으로 독립한다는 것은 나이지리아 역사에서 그것을 빼낸다는 뜻이 아니었다. 식민주의 유산에 맞서서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식민지 문화 자원을 이용해서 식민주의자들에게 맞섬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 - 394p -

 

 .  살아 있는 유물을 연구함으로써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선진 문명' 도는 '고급문화'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개념은 선진 문명의 정점인 뛰어난 예술가들의 놀라운 업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훌륭한 사원과 교회, 조각과 회화의 걸작, 가장 웅장한 교향곡, 가장 중요한 문학 작품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런데 누구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가장 훌륭하다는 것인가? 서구 문화가 그 순위를 정하는 경우가 많았고, 현대 유럽의 문화적 기원으로 여겼던 그리스나 이집트 등 일부 과거 문화가 순위에 올랐다. 호메로스가 묘사하는 청동기 시대 그리스가 아랍 중세 시대보다 현대 유럽과 더 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스는 후대에 유럽의 기원으로 채택되었을 뿐이었다. 당시에는 유럽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럽 개념과 그 문화적 기원을 맞추어서 문화적 걸작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원칙적으로 따지면 걸작이라는 개념을 다른 문화로 확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고학자와 사서는 네페르티니의 흉상, 아즈텍의 사본, 불교 사원, 요루바 조각상처럼 묻히거나 잊힌 걸작을 찾아다녔다. - 401p -

 

     사실 두 문화 개념은 하나로 합칠 수 있었다. 모든 뛰어난 작품은 있었다. 《순자타 서사시》같은 구전 서사시를 말리 문화 최고의 정수로 평가할 수도 있고, 요루바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둔 의식에 사용하는 정교한 에구군 가면을 중국 도자기나 이집트의 데스마스크만큼 '훌륭한지' 걱정할 필요 없이 평가할 수도 있었다. "다른 것만큼 훌륭한가"라는 질문은 이제 말이 되지 않았다. 작품은 서로 다른 이유로 주목받을 가치가 있었다. 그 작품이 만들어진 문화 내에서 특히 가치가 높다거나, (인도에 간 현장처럼) 외국인 방문객을 매료시킨다거나, 호쿠사이의 <거대한 파도>처럼 전형적이거나 '가장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그 문화권 안팎으로 널리 퍼졌다거나, 주목할 이유는 다양했다. 소앙카가 최근 작품에서 말했듯이 문화 상대주의는 문화 탐구의 시작일 뿐 끝이 될 수 없다. 《컬처》 역시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한다.  - 403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