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거부...나는 어떻게 나만의 영웅이 되는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스토리
우리는 자신의 유한함을 근본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우리가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또 다른 이유는 죽음의 두려움에 희망으로 맞서기 위해서다.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 우리는 과게에서 현재로 스토리를 전달하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조상,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의 지식을 보존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 의 저서 《신화 작업 (Arbeit am Mythos)》에 따르면 "스토리는 무언가를 몰아내기 위해 이야기된다. 그 무언가란 가장 무해하지만 가장 중요한 경우에는 시간, 그 외의 중대한 경우에는 공포를 말한다." 동굴 벽화와 함께 구술이 정보를 전달한느 유일한 방식이었던 시대에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것이었다. 또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이 더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이야기는 "소진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자신의 힘을 모아서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모든 존재에게는 자기보존이라는 가장 강한 욕구가 존재한다. 우리 인간 또한 죽지 않고 가능한 한 오래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자신의 유한함을 알아야 죽음을 가급적 성공적으로 막기 위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가능한 한 좋은 삶, 길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도전과제를 극복할 때마다 자신의 유한성을 바타으로 결정을 내린다. 이로써 우리는 성공적인 노력을 성찰하며 그로부터 배우고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야생 동물과는 달리 우리 인간은 갑작스러운 번개가 이유없이 발생한다고 생각하지않는다. 우리는 '근원' 개념을 알기 때문에 번개 역시 어떤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혹은 누간가가 이러한 기상 현상을 일으켰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해명에 중독된다. 이유에 대한 갈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논리적으로 확립할 수 없는 인과 관계가 엉뚱한 곳에 생겨난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객관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최소한 검증할 수 없는 진술에 집착하기도 한다.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성적으로 그 근원에 유리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런 시도 자체를 해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언제부터인가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기 시작한 것은 해방적인 행위이며, 당시의 관점으로 볼 때 매우 기발하고 능동적인 문제해결 방식이다. 무언가를 신에게 바치면 신을 더 잘 달랠 수 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음 날 또 제물을 바친다. 이는 풍족한 수확물을 얻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날시에 우리가 조금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완전히 타율적인 세상에 살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낫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해하면 우리 적응력에 가장 중요한 행동 원칙이 생겨난다. 즉 어떤 것이 그냥 그렇게 우리에게 닥치거나 이유 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에게 위협적인 상태를 지속적인 발전과 변화를 통해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적, 외적 변화를 통해서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절제를 모르기 때문에 삶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인식 뒤에 숨어 있는 '공백공포' (Horror Vacui) 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인과 관계화'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설명이나 이야기의 타당성은 우리가 왜 그것을 믿는지에 대한 수많은 기준 중 하나일 뿐이다. 모든 종교와 그 창조 신화 및 메시아 신화, 거기에 나타나는 온갖 기적과 마법을 한번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보다 스펙터클하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갈라지만 바다. 날아가는 말, 유혹하는 무녀, 이러한 서사적 스펙터클은 그렇게 현실성이 있지는 않지만 좋은 스토리를 만들며, 없는 것보다는 낫ㄷ다. 인간은 그저 절반만 작동되는 잘못된 설명을 견디기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우연성을 견디기가 더 어렵다. 이야기와 설명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는 자연의 힘으로 가득한 우주 앞에서 겁에 질리고 무력해져서 차라리 신과 상상의 피조물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될 것이다.
죽은 원숭이는 이야기지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영웅적 태도를 높이 평가하고 무엇이 영웅적 태도이며 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역경에 맞서고 용기와 성실함, 무엇보다 단호함을 통해 내적, 외적 악마를 물리친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이상화는 실제로 부족에게 실존적 기능을 하고 있었다. 천적 외에 무엇보다 이기주의가 위태롭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희생적인 주인공이 승자가 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패자가 되는 영웅 이야기는 이타적인 행동 규칙을 알리는 홍보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이야기는 그 기능과 효력처럼 계속해서 발전했다. 번식이 진화생물학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사랑 이야기는 사랑을 찾고 가꾸는 과정에서 문제해결 능력을 전수하는 좋은 수단이다. 이야기는 의미뿐 아니라 사회를 결속하는 효과와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는 작용도 하지만 인지 놀이에도 도움을 준다.
우리 조상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죽지 않고서도 다른 사람의 실수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진활르 강력하게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수직적으로, 즉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특정 유전자를 전달함으로써 진화했을 뿐만 아니라 수평적으로, 즉 한 세대 안에서 특정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진화하기도 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여러 일화를 통해 보여주는 생존 기록이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문명이란 성공적인 생존전력과 이기를 여러 세대에 걸쳐 재생산하는 것이다. 더 좋은 이야기일수록 계속해서 이야기되고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주의 깊게 듣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존은 삶에 필수불가결한 이러한 정보를 전달하는 형식이 얼마나 훌륭한가에 달려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더 훌륭한 이야기를 가진 부족이 더 오래 생존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질적 지침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이야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해결을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모든 이야기는 우링게 배움을 준다. 모든 이야기는 구체적이로 명백한 적응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렇게 습관화된 문제해결 능력 덕분에 자신의 현실을, 나아가 끊임없는 적응을 통해 개선한 자신의 삶을 직접 구성하는 존재로 발전했다.
이야기꾼 인간 : 호모 나렌스 (Homo Narrans)
우리 인간은 생존과 진화를 위해 언제부터인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발달을 크게 가속할 수 있었다. 우리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된 유인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적절한 이름은 무엇일까 ?호모 나랜스, 즉 이야기꾼 인간을 이렇게 실명한다. 또한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Alasdair MacIntyre) 도 우리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Storytelling Animals)'이라고 부른다.
모든 인간의 언어는 한 가지 특별한 문법적 특수성을 허용한다. 즉 재귀성 (Recursiveness) 이 그것이다. 재귀성은 예를 들어 부문장이나 여러 개의 종속절로 이루어진 난해한 문장을 통해 문장 내에서 참조를 생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우리가 배우는 문법은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때 정신 속에서 만드는 세계의 시뮬레이션을 구조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신경과학자 벤야민 베르겐(Benjamin Bergen)은 문법이 무엇을 언제 구현해야 하는지 뇌에 알려주는 영화감독과 같다고 생각한다. 벤야겐에 따르면 우리의 문법은 "구현된 시뮬레이션의 어느 부분에 집중해야 하는지, 얼마나 세부적으로 정확하게 또는 어떤 관점에서 시뮬레이션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조정한다.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의 보편문법 이론은 언어 연구의 훌륭한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에게 언어습득 능력이 있다는 것, 모든 언어가 문법 형식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재귀성과 같은 통사적 특징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가 보편적으로 우리 뇌에 내재하여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전 세계의 언어는 문화와 관계없이 공통된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언어는 통사론을 통해 순차적인 시간 감각, 즉 인과적 맥락에서 시간 순서에 따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표현한다. 다른 동물과는 달리 우리 인간은 타임라인이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 좌표, 타임 라인 상의 '언제'라는 개념, 전후의 감각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사소통은 대부분 언제 일이 일어났는지 혹은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진술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계획하고 조정하고 준비하고 협력할 수 있다.
과거 시제 덕분에 우리는 과거 사건을 이야기하고 함께 기억을 공유하고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계속해서 전달할 수 있다. 또한 문법과 시제를 사용하여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도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의 통사론은 상상뿐만 아니라 가능한 현실 혹은 확정된 현실도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 좋게 표현하자면 자기 안에만 존재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부터 미화되거나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전화의 우월성으로 이어지는 생존 요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허구에 의한 생존 (Survival by Fiction) 이다. 그리고 곧 이야기는 우리가 서로에게 경고하거나 위로하는 방식, 우리가 스스로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 모든 인간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완전히 자연적인 초강력 마약
우리 뇌는 대부분 시간을 생존을 유지하는 데 쓴다. 그렇기 때문에 '위협적이다' 또는 '도움이 된다'라는 기준에 따라 주변 세계를 판단한다.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처리하는 방식도 딱 두 가지이다. 좀 더 우회적으로 말하자면, 이야기가 도움을 주는가 그렇지 않은가? 내가 접한 이야기가 내 삶을 더 낫게 만드는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생존에 도움이 되는가?
이러한 실존적 각성은 우리 머릿속에서 혼합된 생화학적 칵테일의 효과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거나 무섭거나 유쾌하거나 감동적이라고 생각할 때 느끼는 것,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할 때 느끼는 것은 신경전달물질의 결과다. 이는 이야기를 들을 때 필연적으로 작동하는 생리적 과정이다. 좋은 이야기를 들을 때 뇌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돌고 네 가지 화학 전달물질을 방출한다.
첫 번째는 코르티솔 (Cortisol) 이라는 전달물질이다. 코르티졸은 모든 순간에 위험을 알리는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방출된다.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은 우리가 싸우거나 도주할 수 있도록 대비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등장인물이 직면한 잠재적 위험에 반응한다. 코르티솔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상황을 바꿔야 하거나 주인공이 뭔가를 바꿨으면 하고 간절히 바랄 정도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두 번째 전달물질은 도파민 (Dopamin)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샐리와 해리가 뉴욕의 유명 샌드위치 레스토랑 '카츠 델리카트슨(Katz's Delicartesssen)' 에서 대화를 나눈다. 샐리는 해리에게 해리의 상대 여성이 가짜 오르가즘을 흉내 낸 적이 있냐고 묻는다. 해리는 단호하게 '아무도 나한테 안 그랬어."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걸 구분 못할 거라고 생각해?" 그가 이렇게 샐리에게 되묻자 그녀는 큰 신음을 내며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오르가즘을 그 앞에서 연기한다. 우리가 맛이 뛰어난 샌드위치를 먹거나 환상적인 섹스를 할 때, 또는 해로운 것을 알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무엇을 하고 있든 계속 해. 최고야."라고 신호를 보내는 전달물질이 방출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추진력과 동기를 부여하는 도파민의 효과다.
도파민은 학습 과정과 정보 저장을 촉진한다. 우리가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면 도파민 수치가 상승한다. 그렇게 되면 도파민이 밀랍처럼 뇌를 살짝 데워주고 이를 통해 새로운 인상이 더 잘 각인됨으로써 기억을 더 잘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홀린 듯한 기분과 함께 주의를 집중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여기서 특별한 점은 몸이 해피엔딩에 대한 희망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감정이 등장인물의 감정과 연결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좋은 감정을 전달하는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게 된다. 이러한 좋은 기분과 이를 느끼고 싶은 우리의 바람은 도파민의 결과다.
옥시토신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우리가 누군가와 혹은 허구적 인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때 방출된다. 주인공과 더 가깝다고 느낄수록, 등장인물을 더 많이 응원할수록 옥시토신이 더 많이 분비된다. 우리는 옥시토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희망과 소원, 꿈을 인지할 때 모두에게 최고의 결말을 기대할 수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배후에는 옥시토신이 있다.
유쾌한 이야기들은 편안하고 오락적이며, 우리에게 자유분방하고 마음 편한 현실도피를 허용하기도 한다. 엔도르핀은 웃음을 통해서 분비되며, 긍정적인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분비된다. 엔도르핀이 분비되기 위해 언제나 황홀한 비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그저 정말로 기쁘다고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정신의 3D 프린터 : 뇌
좋은 소설을 읽는 것은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심리는 우리를 통제된 환각 상태로 옮겨놓는다. 우리 뇌는 일종의 3D 프린터다. 즉 수신된 자극, 즉 읽은 내용을 저자가 의도한 생각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내면의 현실로 변환시킨다.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반드시 매체 중재가 필요하다는 역학과 개방성이라는 점에서 볼 때 쓰기와 읽기는 다름 아닌 생각 전달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조직화된 환상, 장소와 시간을 초월한 곳에서 두 심리 체계가 만나는 것이다.
연구가들은 인간이 복잡한 사건을 상상할 때 그러한 사건을 볼 때 사용되는 것과 동일한 인지-운동 메커니즘 중 일부를 활성화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가 어떤 내용을 듣고 이를 정신적으로 재현해낼 때 생성되는, 인지에 기반한 공간적 정신 모델 (Mental Model)에 반응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우리가 실제로 눈으로 보지 않은 것도 볼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는 마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속임수가 들어 있다. 즉 이야기가 우리 뇌를 새롭게 조립한다는 것이다. 에모리 대학교 (Emory University) 의 그레고리 번스(Gregory Berns)연구진은 소설을 읽으면 휴식 상태의 뇌 연결성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 즉 서로 다른 뇌 영역 사이를 결합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저술가 제러미 애덤 스미스(Jeremy Adam Smith)는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촉발된 문화적 효과에 대해 자신만의 개념을 만들었다. "주의를 환기하는 코르티졸이 사랑 호르론 옥시토신과 섞이면 우리는 '몰입(Transportation)' 이라는 현상을 경험한다. 몰입은 주의 집중과 두려움이 우리의 공감과 결합할 때 발생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린느 사로잡힌다. 이야기가 지속되는 동안 우리의 운명은 상상 속 인물의 운명과 뒤섞인다. 물입 현상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 뇌는 호르몬 칵테일에 의해 일종의 신경학적 가상현실로 옮겨가고 이 가상현실 안에서 우리는 등장인물의 감정을 함께 느낀다. 이것은 우리 뇌가 이야기를 들을 때 생성하고 들은 내용을 재생할 수 잇게 만드는 강력한 행복 알약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목마
우리가 인지한 내용을 논리적 연관관계에 끼워 넣으려고 함으로써, 즉 이야기를 짜 맞추려고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뇌라는 고층빌딩에서 스토리 망을 형성하는 중간층들을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단 새로운 인상에 '의미 부여' 직인을 찍고 서류처에 철하고 나면 일종의 내부 규정, 즉 정신 규칙이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추론하지 못하게 된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이 정신 규칙을 '의미 부여 중단 규칙(The Makes Sense Stopping Rule)'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적절한 틀, 즉 입력된 내용에 대해 우리에게 당연히 그럴듯해 보이는 설명을 찾은 후 상황을 충분히 이애할 수 있게 된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적 자원을 절약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을 바꾸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우리 머리는 어떤 경우라도 이를 피하려고 한다.
캔들 헤븐은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뇌는 날것의 경험을 이야기의 형태로 변환한 다음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억한다. 그런 다음 자신이 처음에 경험한 내용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토대로 행동한다!" 이 말은 정보가 우리 의식에 도달하기 전에 이야기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정보에 대해 만들어진 이야기를 해석한 내용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뇌가 만든 정신적 트로이 목마다. 헤븐은 이렇게 설명한다.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정확한 단어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우리는 요점을 듣는다. 그런 다음, 이 요지를 우리 자신의 어휘를 사용하여 우리 뇌 안에 단어로 변형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자체 제작한 개인화된 버전을 다시 출처로 소급시키고 우리 자신의 버전이 실제로 단어 하나하나 화자가 말한 내용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 때 우리는 우리 뇌가 매일 우리에게 하는 작업을 모방한다. 우리가 성공적으로 모방할수록 이야기는 더 설득력이 있게 되고 몰입이 더욱 강력해진다.
이야기는 우리가 노력하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도전에 맞서면 어떤 사람이 될 수 잇는지를 안전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수정구슬이 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영웅과 동일시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야기는 단지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가 된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 된다. 주인공이 우리를 위해 난관을 극복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승리와 패배를 경험할 때 그들은 이를 우리 입장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거울 속 원숭이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이몬(Daimon)'에 대해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다이몬은 인간의 운명을 체현하는 정령이다. 말하지만 인간이 따라야 하는 삶의 숙명이다. 다이몬 자체는 양면성을 지닌 존재였다. 악한 존재라기보다는 착한 존재로서 말이다. 다이몬은 중세 기독교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악의 근원인 사악한 '악마'라는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카바레로는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지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아킬레우스는 젊은 나이게 죽지만 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 아킬레우스의 다이몬은 '에우다이몬(Eudaimon)', 즉 선한 다이몬이 된다.
인지과학자 볼프강 프린츠(Wolfgang Prinz)는 자신의 저서 《거울 속의 자신(Selbst im Spigel)》에서 인간이 어떻게 사회적 거울과 내면의 거울을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지를 선구적으로 설명했다. 인간은 이미 아기 때부터 보호자의 표정을 모방한다. 즉 표정과 그와 관련된 감정을 그대로 흉내내는 연습을 한다. 이때 아기는 흉내 대상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공감을 경험한다. 인간은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타인의 의미 투영 시스템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행동과 그것의 해석, 기본적인 감정과 원인을 내적으로 모사하고 외적으로 논쟁할 수 있다.
우리는 쾌할한 사람과 함께 웃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한숨을 쉬며, 축구 중계를 볼 때 앉아서 다리를 떨기도 한다. 1990년대 초 이탈리아 신경과학자들이 '거울 신경'을 발견하면서 이러한 초능력의 해부학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특정 행동이나 느낌을 만들어내는 뇌 영역은 우리가 이 행동이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서 인지할 때 사용하는 뇌 영역과 같다.
어린 아아이는 자기 모습을 비춰주고 이를 통해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ㅇ영혼을 지닌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거울을 통해 처음으로 이해한다. 그 후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투영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이에 대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이처럼 아이는 타인에게 투영된 자기의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야기하는 원숭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타인의 의식이라는 무대에서 연기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믿는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서 일련의 스토리를 가지고 잇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성취하고 경험한 것, 앞으로의 계획 등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스토리를 평생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앞에서 끝없이 반복한다. 이러한 자기 설명과 타인이 우리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 사이의 일치는 다른 사회적 맥락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하다.
내러티브 안에서 화자와 청자는 서로를 비춘다. 하지만 내러티브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바로 내러티브가 가상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상 거울 안에서 우리는 정체성과 행동, 의지에 대한 구상을 떠올리고 시험해보고 연습하고 다시 버틸 수 있다. 우리는 삶이라는 극장에서 우리가 맡은 그리고 맡지 않은 모든 약할을 허구라는 안전한 장치 하에서 시험해볼 수 있으며, 사회적 투영을 통해 타인에게 비판받거나 타인을 비판할 수 있다.
자아는 다른 사람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ㄴ느 자신에 대해 내가 말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다양한 변형을 할 수 있고 여러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우리는 모두 여러 존재가 되어 기능적인 정체성과 관계를 서사적으로 함께 형성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내면에서 연극을 하는 원숭이 무리이다.
서사적 자아
서사적 자아라는 개념은 모든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 새롭게 이야기함으로써 비로소 확립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객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작가이자 독자인 자신에 대해 내가 직접 전하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개인의 정체성은 바로, 이 정체서에 의해 생성되고 끊임없이 통합되는 서사 과정에서 확립된다. 이때 자아는 딱딱한 씨 안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또는 전통이나 문학을 통해 전승되면서 자아에 부과되는 서사를 통해 변형되며,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개인의 전체 이야기가 재구성된다.
서사적 정체성 (Narrative Identidy)은 다음과 같은 내면 거울의 두 가지 측면을 결속시킨다. 즉 오래도록 지속되는 불변의 특성과 지금의 자신이 되기까지 끊임없는 자기실현이 그것이다. 그리고 자기실현은 여러 이야기와 지속적인 해석, 수정을 허용하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이거나 완결될 수 없다. 이처럼 자기실현은 자기 서사의 도움으로 자신이 살아온 경험의 임의성이나 무작위성을 방지하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 내적 일관성을 이루는 사람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시간성을 성찰하는 능력, 실패와 승리를 파악하는 능력, 시작과 목표가 있는 이야기, 시간 순서대로 그리고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난관 극복 에피소드를 형성하는 능력 덕분에 우리가 누구인지 인식한다. 나는 불변의 존재이자 발전의 존재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 속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 다른 영웅
인간은 고도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의 이야기 또한 무엇보다 자신과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 문화와 가장 기능적인 관계로 설정하는 수단이다. 이때 이타적-집단주의 목표는 언제나 이기적-개인주의적 목표와 얽혀 있다. 이 두가지 욕구는 한편으로는 수용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계측 구조에서 상승하기 위해 교대로 나타난다. 윌 스토는 이를 간단한 말로 설명한다. 즉 "함께 어울리면서 남보다 앞서 나가는 것(to get along and get ahead)"이다.
문자 이전의 문화에서 이야기는 이타심과 공평함을 통해 함께 어울리고 최적의 문제 해결을 통해 나란히 앞서 나가며 근본적인 창조 신화와 인과성 신화를 통해 세상을 헤쳐가는 기능을 수행했다.
우리가 오늘날 개인의 업적과 성과, 성공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리스 사상에서 기인한다. 옹호해야 한느 이상으로서 개인의 자유, '자기실현'에 대한 개인의 권리, 목표가 아닌 성공적인 삶의 출발점으로서 집단, 이 모든 것은 그 당시에 이미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개인의 기대, 즉 다이모니아(Daimonia)와 그것의 실현, 즉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를 믿었다. 그러나 또한 자유 의지와 운명, 나아가 운명과 반대되는 길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도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테네인들은 세계 최초로 시민들이 자신에 대해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할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완성되었을 때는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지만 법과 정의가 없으면 최악의 피조물이다"라고 썼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민주주의라는 정치 형태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Ashes to Ashes, Dust to Dust)',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으며 오직 믿음과 순종의 삶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삶에서 나 자신과 싸운다 해도 나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나의 육체와 생각, 모든 감정이 근본적으로 불결하며 사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느 가급적 실수를 덜 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이 창조한 인간은 이상한 뱀과 사과 이야기 이후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서로 다른 서사 방식은 오늘날 개인이 세계를 어떻게 인지하는지를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집단학살 사건의 경우 미국 언론인들은 살인자의 성격적 결함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중국 기자들은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같은 삶의 배경 문제를 강조한다.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세계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다른 세계를 본다. 어떤 사람들은 주로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을 관찰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대상과 맥락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환경의 복잡성은 서양인보다 아시아인이 더 감당을 잘한다.